야고보서(완료)

약1:22-25(22.04.05.화)

은혜바라기 2022. 4. 5. 08:33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오늘의 말씀이 성경에서 가장 오해가 많은 말씀입니다. 더불어 서신서의 핵심이 있는 말씀이기도 하죠. 그리고 이 말씀 때문에 오히려 많은 크리스천들이 야고보서를 좋아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대부분의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이 말씀을 ‘거봐~~ 말씀을 듣지만 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잖아~~ 말씀을 잘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잖아~~’라고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행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죠. 

 그러나 이 말씀의 본질적 결론은 ‘우리는 말씀을 행할 수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오직 말씀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역설(paradox)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자세히 알아보죠. 

 한가지 예를 먼저 보죠. 어린아이가 슈퍼맨 영화를 보고 나면 자기도 빨강망토를 두르고 높은데서 뛰어 내리면 나를 수 있다고 상상합니다. 이 어린아이의 상상을 무참하게 깨려면 망토를 두르고 높은 계단에서라도 뛰어 내려봐야 합니다. 그래서 무릎이 까지고 아파봐야 비로서 ‘나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하나님의 긍휼인 예수님만 소망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말씀을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하여 ‘자신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상상만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좀 더 넓은 범주로 확대해서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행하기 위해서 이웃에게 돈과 옷을 기부하고 주말 내내 그들을 위해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죠. 그러나 성경은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라고 말합니다. 또한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을 살인이라고 하죠. 즉, 말씀이 우리에게 진짜 행하라고 하는 수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득하게 높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말씀을 제단하고 그것을 행했다고 하죠. 이것은 성경을 행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상상만 한 것, 즉 듣기만 한 것이라고 성경은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진짜로 말씀대로 행하려고 하게 되면 결국 할 수 없다는 결론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이중 비유에 역설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어렵습니다. 잘 따라 오세요. 그리고 복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핵심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라 되라’는 말씀은 ‘너희는 말씀을 행해서 그것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또한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의 뜻은 ‘말씀을 내가 행할 수 있다고 믿는 자는 진짜 말씀대로 행하여 본적이 없는 자, 즉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이 행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제사로 예를 하나 더 들어보죠. 제사에 쓰이는 양에 대한 묵상을 하겠습니다. 율법에는 집에서 기른 흠 없는 양을 데리고 수 십, 수 백리를 걸어서 하나님께 받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깊이 묵상을 해보면 과연 흠 없는 양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만약 그런 양이 있다 손 치더라도 이 양을 집에서 부터 제단까지 직접 끌고 오면서 도중에 전부 흠이 생길 수 밖에 없죠. 그래서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절대 흠 없는 양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구나. 어떻게 해야 흠 없는 양을 구해서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인가!~~’까지 인간이 도달하기를 바라신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흠 없는 양인 예수님의 필요성을 알기 원했던 것이죠.

 그런데 인간은 이 흠 없다는 기준을 자신의 기준(인본주의)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올바른 제사를 행했다고 스스로 판단하죠. 

 “갈6:7상 스스로 속이지 말라”

 그래서 오늘 말씀인 약1:22은 복음의 핵심이 되는 말입니다. 특히 이 표현 때문에 야고보서가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야고보서를 흔히 행위의 책이라고 부르죠. 믿음 보다 행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행위있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고 하죠.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행위로 완벽하게 실행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예수님 뿐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이중 비유와 역설이 숨어 있는 책입니다. 재미있게도 이중비유와 역설의 이유 때문에 이 말씀이 정확하게 ‘인본주의 종교’에서 가장 논리적인 말씀이 됩니다. 즉, 만약 검은색을 칭찬하게 된다면 그 이유가 그 검정색 때문에 흰색을 알게 되는 것 때문인데 이것을 단지 ‘거봐~~ 검은색으로 살아야 된다잖다’만 남게 되는 이치죠.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이제 이 말씀이 조금 이해가 되시죠.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바로 예수님을 제외한 인간 전체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보는 것은 거울을 본 후 곧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볼 때 자신이 인본주의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다시 생활 속에서 그것을 잊어버리고 결국 인본주의에 묶여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구절에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율법이 어떻게 자유로울까요? 이것도 역설이죠. 율법은 우리를 옮아매는 밧줄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다 행하는 자가 되어야 자유롭게 된다고 하죠. 즉, 이것을 진짜로 행하려 할 때 이것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진정으로 예수님의 필요성을 알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것을 나 대신 전부 다 하셨다, 즉,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예수님의 방향에서 보면 이것을 정말로 다 행하신 유일한 분이신 것이죠. 그래서 이 말씀은 이중 비유와 역설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진짜 진짜 어렵죠? 

 너무 너무 중요하여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 이 말씀을 가지고 이 땅(인본주의)에서 온전하게 행하려고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결국은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까지 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너무 가볍게 보고 있죠. 이 세상을 구하고 목숨을 바친 많은 성인들의 위대한 죽음의 수준으로 보고 있는 경향이 있죠. 즉, 나라를 위해 죽은 이순신장군, 자식을 위해 죽은 어머니, 부하들을 위해 죽은 지휘관, 심지어 노조를 위해 분신자살을 한 노조위원 등등. 그런데 이 분들이 휼륭하긴 하지만 이런 것은 사실 누구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 죽음의 교환으로 얻는 '명예'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자존심을 높이는 것'에 목숨까지 걸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상상하는 수준을 아득하게 넘어갑니다. 이 당시 십자가는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이 받는 형벌입니다. 그리고 그 형벌 전에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갔죠. 즉, 이 세상 모든 자들이 전부 다 예수님을 멸시하고 돌을 던져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시킨 하나님께도 버림받는 순간인 것입니다.

 

 내가 내 편을 위해 죽게 되어 그들이 나를 알아 주는 것을 상상하면서 행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가 다 예수님께 돌을 던져 죽인 것이고 예수님은 그것을 스스로 계획하신 것이죠. 그런데 그 이유가 도망친 제자들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바로 돌을 던져 죽인 자들(십자가에 직접 매단 자들)의 구원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직접 명령하신 하나님께도 버림받는 것이 최종 결론이라는 것을 스스로 계획하고 실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나요? 모든 율법의 말씀을 완벽하게 죄인들 속에서, 즉 인본주의 속에서 행하다 보면 나올 수 밖에 없는 결론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행해야 한다.'라는 말씀은 최종 결론은 십자가를 뜻합니다. 우리는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정체성'이죠. 

 

 그러나 아직도 인본주의 종교에서는 말씀의 기준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낮추어서 '말씀을 행하고' 있죠. '나! 100만원 벌어서 10만원 냈다. 난 휼륭한 교인이 되었다. 그래서 천국에 간다. '의 수준이 지금의 기독교입니다. 더 웃긴건 이런 수준의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의 자리에 수두룩하게 앉아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하필 바리새인의 시대에 오셔서 그들을 '이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욕을 하시고 그것을 기록해서 지금 현대 우리들로 하여금 읽게 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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