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오늘 말씀은 중간에 나누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냥 다 실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이 야고보서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믿음과 행위’에 대한 매우 깊은 묵상이 필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방향성을 잘 잡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바리새인’처럼 행위를 강조하는 맹인의 길에 서게 되죠.
이 말씀의 방향성은 ‘우리는 믿음도 없고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오직 믿음은 예수님만 가지고 있으며 오직 예수님만이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입니다. 이 방향성을 가지고 잘 따라 오시기 바랍니다. ( 그래서 모든 서신서 앞에 로마서를 배치해 두신 것입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오직 믿음’이죠. 로마서는 모든 성경 중에 가장 쉬운 성경입니다. 틈틈히 읽어 보세요. )
14절을 보죠.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유익이 없다. 그 믿음은 구원을 할 수가 없다.’라고 하죠.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이 말씀을 오히려 간단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 그러니 앞으로 더 열심히 신앙생활, 봉사활동의 행함을 하자’라고 쉽게 해석하게 되죠. 그러나 복음에 눈을 뜬 자들은 이 말씀의 뜻을 ‘내가 어떠한 율법도 행할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즉 나는 행함이 없는 자이므로 나의 믿음 조차도 다 거짓된 믿음이었구나. 이 거짓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구나~~’라고 해석하게 됩니다. 어렵나요?
즉, 이 말씀은 ‘믿음 보다 행위가 중요하다.’가 아니라 ‘인간은 온전한 행위를 못하기 때문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믿음은 다 헛 것이다.’의 방향성이라는 것입니다.
15,16절을 보죠. 이 말씀은 ‘헐벗은 형제에게 말만 하지 말고 그에게 진짜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주라’는 뜻이겠죠.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이 15,16절도 '그렇구나~~ 앞으로 헐벗은 형제에게 말만하지 말고 돈과 음식을 잘 사주어야 겠다.~~'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영에 있는 분들은 '내가 이렇게 말만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구나~~'의 방향성을 갖게 됩니다. 촛점을 잃지 마세요 ! 여기 15,16절의 에피소드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비꼬는 장면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그 무엇을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15절의 ‘일용할 양식’이란 복음(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인간도 복음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그냥 말만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 이라는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의 본질은 진짜 복음을 줄 수 있는 행위(십자가)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는 절대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진짜 복음을 줄 수 있는 행위를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라는 것이 그 촛점입니다. 이 방향성을 잘 따라 오셔야 합니다.
17절을 보죠. ‘행함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의 방향성도 ‘그래서 행해라~’가 아니라 ‘그래서 ~ 나의 믿음은 죽은 것이구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죠. ‘너는 행함없는 믿음을 보여라. 나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겠다’라고 하시죠. 정확하게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만 십자가의 행하심으로 그 분만이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예수 믿고 천국간다.’라는 믿음은 거짓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참 믿음의 출처는 오직 예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을 뜨고 복음을 알게 되면 이렇게 ‘복음을 앎’이 참 믿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죠. 그 ‘앎’은 ‘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앎’이죠. 어렵죠? 그런데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오셔서 눈을 뜨게 해야 복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19, 20절에서는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이고 그 분을 있다고 믿고 있다’고 하시죠.(귀신도 믿는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진짜 있다고 믿는다.’라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라도 그것이 ‘믿음’이 아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여러분이 어서 어서 눈을 뜨셔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문구가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이 허탄한 사람아~~’라고 탄식하시는 것이죠. 그리고 나온 말씀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 것이란다.’라고 하시죠. 또 다시 되돌림표입니다. ‘그러니 행해라~~’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전부 다 ‘헛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행함’을 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예수님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죠.
21-23절까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들었죠. 여기서도 ‘거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행함 때문에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잖아~~’의 방향성이 아닙니다. (계속 저의 글이 인본주의와 복음의 갈등구조식 대화로 쓰여지죠? 사실 이것이 평생 선택받은 자들의 내면의 싸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치는 것은 무엇을 말하죠?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만이 이렇게 행하여 믿음을 증명했다는 말입니다.
( 그럼 아브라함과 이삭은 뭐냐? 이 둘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손가락, 즉 상징입니다. 결국 이삭은 안 죽죠. 이것도 결국 인간은 예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 이삭대신 그래서 숫양이 죽게 되죠. -- 이 부분을 더 깊게 들어가면 내용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다음에 집중해서 다루죠.)
그래서 24절의 결론이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오직 예수님만이 십자가의 행함으로 의롭게 되신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인본주의 종교인의 시각으로는 ‘그래~~ 내가 더 의롭게 되기 위해 이제부터 행함에 신경쓰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자’의 방향성을 갖게 되면 완벽하게 예수님의 필요성에서 떨어져 유기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말자의 방향성에 묶기면 이것은 영지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되 그것에 묶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는 목적(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
25절은 보죠. 기생 라합의 이야기입니다. 이 25절은 복음의 눈을 뜨지 못하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복음에 눈을 뜨신 분들은 엄청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들으면서 매우 심도 있는 묵상을 하세요.
기생 라합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그래서 기생, 즉 죄인의 몸을 입고 있는 의로운 행위를 한 라합으로 표현한 것이죠. 또한 ‘고난 받는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하는 것’에서 이 사자는 바로 선택받은 자들을 뜻합니다. 이 자들이 여리고라는 죽음의 도시, 즉 인본주의 세상에 들어와서 고난을 겪고 있죠. 즉,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선택받은 자들이 고난을 받고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다른 길로 나가게 함’으로 표현했죠. 정말 성경은 기가 막히게 정교하지 않습니까? ‘다른 길’이라는 표현으로 ‘인본주의 길과 복음의 길’에서 예수님께서 복음의 길로 이 자들을 이끄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26절 결론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죠. 심지어 이런 자들을 ‘영혼 없는 죽은 자’라고 표현하십니다. 우리의 현대 상태를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복음이 보이십니까? 서신서 본론에 들어가면 이것보다 더 복잡한 이중, 삼중 구조의 복음을 설명합니다. 간단하지 않죠. 그래서 늘 깨어있으라는 말씀을 성경에서 하고 있죠. 눈을 떠서 깨어 있고, 다른 길에서 절뚝거리지 말고 복음의 길에 서 있고, 귀를 열어 들어야 하며, 인본주의에 묶여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맹인의 기적, 절름발이를 고치는 기적, 귀가 들리게 하시는 기적, 귀신에 묶여있는 자를 풀어주는 기적을 예수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전부 다 인본주의 종교에 묶여 있는 나의 모습이죠.
오직 성경은 전부 한가지 주제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주인공 예수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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