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완료)

약2:6-9(22.04.08.금)

은혜바라기 2022. 4. 8. 08:40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 가난한 자와 부자 ' 이 두 종류의 사람을 누구나 잘 구별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잘 구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을 이용하여 성령께서는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가르침이 없이 스스로(사사로이) 말씀을 푸는 자들은 오직 인본주의 해석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통장에 돈이 없는 자와 통장에 돈이 많은 자'의 방향성으로만 해석을 하게 되죠. 

 "벧전1:20-21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예언 = 말씀(말씀의 속뜻=복음))

 

 그래서 오늘 말씀의 ‘가난한 자’는 이 세상에서 모든 가치를 잃어버린 자를 말합니다. 사실 이 부분이 복음에 눈을 뜬 자들의 공통점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단 1명도 예외가 없습니다. 물론 이 과정이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성령께서 견인해 가십니다. 어떤 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가치를 추구하다가 망하면서 그 가치를 잃어버리고 반대로 어떤 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가치를 다 이루죠. 그런데 다 이루고 보니 오히려 허망함을 느끼면서 그 가치를 역설적이게도 잃어 버리고 말죠. 어떤 자들은 경험하지 않고도 성경과 책 혹은 간접 경험을 통해 그 가치들이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면서 그 가치를 잃어 버리죠. 

 예를 들어 보죠. 가수 싸이를 아시죠? 그는 4분짜리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 하나로 세상을 움직이는 100명의 위인에 뽑혀서 인기(권력)을 얻었고 자손 대대로 부유하게 살 수 있는 재력까지 얻었습니다. 이 간접 경험을 통해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가수 싸이를 인본주의 바벨탑의 꼭대기에 놓고 그를 쫓아 그 가치를 자신도 갖기를 바라며 노력하는 방향성을 갖죠. 그런데 복음에 눈을 뜬 자들은 그 반대가 됩니다. 즉, ‘고작 4분짜리 노래 하나로 이 세상에서 누구나 바라는 가치를 소유하게 된다고? 그런 가치가 이 세상의 최고의 가치라고?  그렇다면 이 세상이 말하는 가치들은 모두 다 저렇게 가치없는 것이 아닌가!!! ~~ 나는 이제까지 속고 있구나~~ 이 세상에 참 가치는 없구나~~  그렇다면 진정한 가치는 어디 있을꼬~~ (이렇게 진리(예수님)을 찾아가는)’ 라는 방향성을 갖게 되죠. 이렇게 같은 현상을 두고 두 가지 방향성, 즉 두 길로 갈리게 됩니다.

 이렇게 선택받은 자는 누구나 결국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없이 태어나면서 부터 100% 이 세상의 가난함을 인식하고 태어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즉, 이 세상의 기준으로 가장 가난한 자로 오신 분이시죠. 

 그래서 오늘의 말씀에 이 가난한 자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간다고 표현된 것입니다. 즉,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법정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나와 예수님이 한 몸이라는 안경을 쓰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구절 끝에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표현된 것이죠. 예수님의 이름을 아름답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우리를 아름답다라고 여겨주는 것이죠. 이 짧은 한 구절에 '아가서' 전체의 내용을 담은 것입니다. 

 

  "아1:3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교회가 예수님을 아름답게 보는 장면)

 

 "아4:10 내 누이, 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향기롭구나"(예수님이 교회를 아름답게 보는 장면)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성경의 핵심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이 말씀도 나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결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나를 그 분의 몸과 같이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죄인인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데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복음을 이루어 내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최고의 법’이라고 강조까지 하신 것이죠.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큰 최고의 법입니다. 절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지막 9절에 보면 우리가 차별을 하는 순간 율법이 우리를 범법자로 정죄한다고 나옵니다. 이 말도 조금 어렵습니다. 잘 따라오세요.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차별행위=죄’라는 뜻이지만 사실 예수님 스스로가 차별하는 말들을 많이 하셨죠. 특히 바리새인을 차별하셨죠. 하나님도 성경 곳곳에서 항상 차별하셨습니다. 민족들간의 차별도 심하셨죠. 이상하죠? 

 그래서 이 말씀은 차별의 원인인 ‘한 몸 원리'까지 파고 들어가야 이해가 됩니다. 차별의 본질적 이유는 ‘너와 나는 다른다’ 즉, ‘나는 너와 다르게 가치가 크다.’ 즉, ‘너는 가치없는 자’이다. 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확장시켜보면, ‘너는 마음에 가치가 전혀 없는 마음이 가난한 자이다. 나는 너와 다르다.’입니다. 고로 차별을 하는 자란 가장 마음이 가난한 자인 예수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에서 이런 자들을 범법자라고 규정하죠 

 

  "요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죄란 예수님을 믿지 못하여 분리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요한복음16장9절이 완벽하게 이해가 되시는 분들이 바로 복음에 눈을 뜬 분들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 말씀을 ' 내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이라는 감정에 집중해서 예수님을 더 굳게, 더 강하게 믿자. 그래야 죄라고 명칭하는 올바르지 못한 신앙에서 벗어나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다.' 의 방향으로 이해하죠. 

 그렇지 않습니다!  이 요한복음 16장9절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여 여전히 죄인의 상태, 즉 죽은 자의 상태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정체성은 내가 알고 싶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오셔서 알려주시는 것이죠. 이 예수님의 정체성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풀어서 설명한 것이 '성경 66권 전체'입니다. 고로 '복음'을 안다, 모른다. 가 바로 심판의 갈림길이 됩니다. 

 

 '복음'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짧은 묵상으로 오늘의 묵상을 마치죠. 복음은 '복된 소식'을 말합니다. 즉, 우리는 죄인, 지옥가는 자, 가난한 자(무가치한 자)입니다. 즉,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죠. 우리가 그 무엇을 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에 굳게 믿음을 소망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외치고 외친다고 해도 그냥 입만 움직인 죽은 자일 뿐입니다. 달라지는 것은 단 1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죽은 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어 있는 사람들 중 몇 몇 소수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넌 예수님 때문에 살았어" 라고 귓속말로 속삭여 주는 '복된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앎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즉, 이 소식(앎=믿음)은 나하고 전혀 상관없는 외부(성령)에서 들어 온 것입니다. 즉, 출처가 예수님(from성령님)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교인들의 대부분의 믿음의 출처는 바로 본인들의 마음이 그 출발선이죠. 이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 정확하게는 참 믿음을 이해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그림자(표지판)일 뿐입니다. ) 이런 믿음은 불교, 힌두교, 무당 심지어 아프리카 토속 신앙에도 존재하죠.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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