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4복음서가 복음에 대한 본질적 내용이라면 이후 서신서들은 전부 누룩을 경계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성경은 인본주의가 죄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인본주의에서 분리되어 복음의 진영으로 들어가는 것이 참 거듭남이라는 것을 알려주시죠. 그런데 이렇게 복음의 삶을 살게 된다고 해도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옛 사람과 함께 인본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인본주의 누룩이 섞이죠. 서신서는 그것에 대한 경고의 책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매우 어렵습니다.
서신서들은 매우 도덕적이고 은혜로운 삶을 살라는 말씀을 하시죠. 물론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묶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서신서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서신서에는 모두 2중 구조의 복잡한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 2장에서 복음과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시고 3장 부터 누룩에 대한 구체적인 경고가 계속 나옵니다. 같이 살펴보죠.
1절을 보죠. ‘선생이 되지 말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말의 실수‘을 그 원인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참 복음을 듣게 되면 매우 아픕니다. 그리고 재미도 없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쌓아가는 것도 아니고 높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 믿음이 높아진다는 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믿음은 확장의 개념이 맞습니다. 나의 믿음이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의 믿음(앎)이 내 인생에서 확장되는 것이죠. )
여기서 ‘선생’이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들을 말합니다.( 지금의 목사가 이 역활을 맡고 있죠. ) 그런데 이 자들도 이 땅에 살면서 옛 자아와 같이 살아가기 때문에 말씀을 전할 때 좀 더 잘 전달하려고 '노력'이라는 것을 하죠. 그런데 이런 노력이 결국 말씀에 누룩을 섞게 됩니다. 누룩없는 맛 없는 빵을 주어서 원성과 원망을 듣다가 아주 약간 누룩을 넣어 보면 먹기 좋은 빵이 되어 누구나 칭찬하고 박수치는 선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 이 글을 쓰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완벽하게 제 속에 있는 복음을 그냥 꺼내 쓰게 되면 ‘미친놈’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래서 이 묵상을 듣는 분을 생각하며 쓰게 되고 수정하게 되죠. 그런데 여기서 누룩이 묻게 됩니다. 즉 노력이 누룩이 되는 구조죠. )
사람은 이런 인본주의적 방식에서 누구도 벗어나기가 힘들죠. 그렇다면 이것을 완벽하게 배제시키고 오직 복음만 전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그 삶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삶의 결과가 십자가입니다. 완벽한 박해와 죽음이라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것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누룩을 섞습니다. 단언컨대 예수님을 제외하고 모든 지도자들의 설교는 무조건 누룩이 섞이게 됩니다.
그래서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죠. 그 자리는 자랑스러운 사역의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누룩입니다. 진짜 사역은 피하고 싶은 자리입니다. 예수님도 피하고 싶으셨던 것이 그 사역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인간이 그 사역을 기쁜 마음으로 한다고요? 어불성설입니다. 자신의 중심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기쁜 마음이 드는 이유는 정확하게 ‘나의 교만이 인정받음’이 되어서입니다. (교만이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사람 안에는 두 요소가 공존하게 됩니다. 그것을 2절부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계속 설명을 하시죠.
2절을 보면 ‘말의 실수가 없는 자라면 온전한 자’라고 하시죠. 이 온전한 자는 정확하게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 내는 것을 뜻하죠. 인간의 내면은 온통 추악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말은 오직 누룩으로 더럽혀져서 나오게 됩니다. 그것에서 자유로우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분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15: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인간은 누구나 '똥'을 싸죠. 그리고 그 똥을 더럽하고 느낍니다. 그런데 왜 똥을 싸고 더럽하고 느낄까요? '먹었으니까 싸게 된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규칙을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본질적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 음식을 먹어야 살게 끔 창조하셨고 또한 그것을 배설하게 끔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매우 불편한 이 두 가지를 가만히 생각을 해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도록 창조하실 수도 있으셨고 심지어 먹어도 그 모든 것이 다 소화가 되도록, 즉 배설하지 않도록 창조하실 수도 있으셨죠. 왜 굳이 이런 불편하고 더러운 시스템을 만드셨을까요?
그래서 이 세상은 모두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복음의 핵심에 눈을 뜨지 못하면 절대 이 세상도, 말씀도 그 본질을 들여다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더러운 똥을 배설하도록 하신 이유는 정확하게 마태복음15장11절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준비하신 것입니다. ( 좀 더 영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마태복음 15장 11절이 의미적 순서로 먼저이며, 이 후 자연이 순응하여 피조물이 더러운 똥을 배설하도록 된 것이죠. )
즉, 인간의 내면은 모두 더럽다. 즉, 악하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부모되신 하나님께서 매일 계속 반복하시겠죠. 그래서 똥을 매일, 평생 싸게 됩니다. 즉, 매일 반복하여 우리 속에 더러운 것만 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시죠.
그러나 음식을 먹는 것은 그 반대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바로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먹어야 살게 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복음을 계속 먹어야 살게 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음식은 먹을 때 '너무 즐겁고 행복하게 느끼도록' 창조 되었죠. 그리고 음식도 반복해서 먹도록 만드셨죠. 그것도 매우 중요한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즉, 매일, 평생 예수님의 복음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하나님의 잔소리며 그것이 영적으로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일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그 안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추악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외부에서 성령께서 알려주시는 복음만이 깨끗하고 선하죠. 그래서 그 복음 자체는 완벽하게 '선'합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나의 내면에 들어와서 다시 밖으로 표출되는 순간 더러움이 묻게 되죠. 이것은 예수님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과 모든 서신서의 저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서신서도 사실 누룩이 덕지 덕지 묻은 표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것을 사용하셔어 복음의 핵심을 전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검은 색과 흰 색을 동시에 사용하여 흰 색을 더 잘 설명하데 이용하고 계시는 것이죠. 제가 서신서는 '누룩이 덕지 덕지 묻은' 이라는 표현이라는 말을 썼지만 성령께서는 그렇게 해서 완벽한 복음을 설명하고 계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을 이 죄된 땅에 보내셔서 그 안에서 복음을 알게 하는 방법과도 똑 같습니다. 또한 선택된 자들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눈을 뜨더라도 죽기 전 까지는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옛 자아와 함께 살면서 그 옛자아의 추악함을 계속 보면서 '나는 정말 죄인이구나~~ 나는 정말 예수님이 아니면 안되는구나~~ '의 '증인의 삶'을 살도록 하신 방법과도 똑 같습니다.
"롬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말에 대한 묵상을 내일 좀 더 이어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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