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절에 보면, 바울은 지금 ‘변명’을 하고 있다고 미리 선언을 합니다. 바울은 지금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에게 변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변명을 하고 성령은 그 변명을 성경에 기록하여 복음을 설명하고 계시죠.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해야 합니다. 인본주의 종교관에 묶여 있는 자들은 '휼륭한 바울이 말하는 것을 잘 듣고 잘 새겨야만 해~~'라는 방향성에 갇혀서 끝이 다른 해석을 하게 됩니다. 끝이 다른 해석을 이(다를 이) 단 (끝 단)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끝은 항상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에 묶이면 그의 행위를 쫓는 방향성에 묶이기 때문에 '행위'라는 우상을 품게 되죠.
실제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을 것이 두려워서 동료들의 권유로 유대인들의 결례를 보란 듯이 행했죠. 바울의 그런 행위는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보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온 다른 유대인들은 이미 바울의 모든 것을 엇나간 시각으로 보았기 때문에 바울을 더 박해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런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지금도 힘써 변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바울의 모습입니다.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 비겁함, 변명을 바울도 가지고 있죠.
그러나 성령께서 이것을 성경에 기록하셨다는 것은 전혀 다른 각도의 이야기입니다. 이 변명을 통해 바울과 예수님이 어떻게 만났는지를 조명하고 계십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 바울의 변명은 그 변명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말씀을 읽고 있는 현재의 여러분을 위한 성령님의 섭리입니다.
바울은 3절-5절에서 자기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자기가 교회에서 가장 열심을 냈던 자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에 더 열심히 다가 갈수록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정확히 인본주의 종교와 복음의 진영이 나누어지는 갈림길이 됩니다.
그러나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에서 어떠한 일도 하지 말자’의 방향성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봐야할 올바른 방향성은 우리는 그 무엇을 해도, 그 어떤 열심으로도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초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교회에 열심히 봉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 열심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잘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역설의 역설이죠? 그래서 복음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이 역설을 잘 표현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롬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역설의 역설의 역설이죠)
율법은 그것을 꼭 지켜야 하는 '행위'를 동반합니다. 잘 지켜야하고 꼭 지켜야하고 열심히 지켜야 하죠. 그러나 그럴수록 율법은 절대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경험합니다. 그러나 여기부터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뉘게 뵈죠. 눈을 뜬 자와 눈을 감은 자, 즉 선택받은 자와 유기된 자로 나뉘게 됩니다.
선택받은 자는 율법을 절대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로 오셔서 율법을 다 이루신 예수님만을 소망하게 되죠. 그러나 유기된 자들은 그 율법을 자기의 잣대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래서 율법을 '이 정도면 잘 지키고 있는 것이야~~'라는 수준으로 만들죠. 이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스스로 속이는 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기 수준의 율법을 기준으로 이것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을 손가락질하는 것을 '비판'이라고 하죠. (이것을 예수님이 깨닫게 하기 위해서 '형제를 미워만 해도 살인이란다~~'라고 율법의 본질을 알려주셨죠.)
그래서 선택된 자들은 심지어 농사를 지어도 결국 하나님이라는 분을 인식하게됩니다. 농부가 벼를 심고 물을 주면 벼는 잘 자라게 됩니다. 농부는 그런 벼를 보면서 ‘내가 잘 키우고 있다.’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정말 ‘벼가 자라는 것’이 농부의 힘일까? 만약 그것이 농부의 힘이라면 농부는 프라스틱에 물을 주어도 잘 자라게 해야 합니다. 농부가 한 일은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벼가 자라는 규칙을 이해하여 벼를 ‘땅에 심고’ ‘물을 주는 것’에 약간 참여만 한 것 뿐입니다.이 벼가 한 눈끔이라도 자라는 것은 사실 ‘기적’이죠. 하나님께서 생명의 원리를 이 벼에게 적용하신 결과입니다. 이렇게 생명의 원리, 자라는 원리를 찾으려고 평생을 연구한 박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마늘’로 이 연구를 했죠. 무신론자였던 그는 결국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늘 조차도 깊게 파고 연구하다보면 도저히 하나님이라는 분을 인정하기 않고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수 없이 나타난다.'
벼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요? 벼가 자라는 것을 더 연구하고 들여다 보면, 그 안에는 과연 어떤 메시지가 들어 있을까요? 즉, 1단계 깨달음은 단순히 '아~~ 그렇구나 벼는 내가 키운 것이 아니로구나~~ 나는 하나님의 법칙에 약간 참여만 한 것일 뿐, 벼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자란 것이구나~~' 입니다. 그러나 복음에 눈을 뜬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궁금해 하죠. 그래서 왜 이런 규칙을 우리에게 주셨을까? 왜 하필 씨를 땅에 심는 규칙일까? 왜 씨가 죽어야 생명이 시작을 하게 될까? 왜 물을 주어야만 생명은 자라게 될까? 그렇게 자란 생명은 왜 동물들의 먹이가 될까? 등등 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생명의 규칙을 잘 연구하면 정확하게 ‘복음’이 드러납니다. 신기하죠?
생명은 빛(예수)을 받아야 살 수 있단다. 생명은 물(은혜)를 먹어야 살 수 있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씨(예수)가 땅(이 땅에 오신)에서 죽어야(십자가) 다른 생명을 맺을 수 있단다. 그래야 그 생명들인 열매들(교회)이 풍성해 진단다. 그런 열매들은 추수하는 시기(심판)가 있단다. 그리고 다시 그런 생명(예수)은 짐승(죄인인 나)의 먹이가 된단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어야 살 수 있는 나) 등등등...... 이 땅의 그 어떤 것도 복음을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뿐이죠. 우리는 진짜 세상을 외면한 채 우리가 만든 가짜 세상인 바벨탑(돈, 명예, 권력...)만 보고 있죠. 우리는 메트릭스 세상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관점은 노력과 연구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예수님의 신부들에게 오셔서 그들의 눈을 열어서 ‘비밀’을 알려 주시는 것이죠.
이렇게 바울도 6절에서 드디어 ‘빛’을 보고 ‘소리’를 듣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는 것을 바울의 에피소드로 설명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때 바울은 ‘땅에 엎드러져’ 있죠. 땅은 인본주의를 가리킵니다. ‘엎드러져’라는 뜻은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즉, 나와 바울은 모두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실 바울은 예수님을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교인들만 박해했죠. 그런데 예수님은 교인들을 박해한 바울에게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은 교회를 본인과 한몸으로 보고 있는 것이죠.
바울과 같이 있던 사람들은 빛을 보면서도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스님도, 무당도, 교수도, 농부도 모두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선택된 자들만 예수님의 소리를 듣게 되죠. 참 복음을 알아듣게 됩니다. 즉, 예수님의 참 정체성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변명이 너무 길어서 나머지는 내일 나누어서 묵상을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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