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오늘도 계속되는 바울의 변명 속에서 성령님의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다멕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나게 된 바울은 예수님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오해입니다. 인간은 교회를 가서 예수님을 배우게 되면 제일 먼저 ‘내가 무엇을 할까?’부터 고민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복음은 정 반대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 전부입니다. 즉, 내가 기준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기준이 되는 것이죠. 오직 예수님이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맹인’의 상태가 됩니다. 즉, '내가 무엇을 할까요?' 라는 바울에게 '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답변을 '맹인이 되는 것'으로 해 주신 것이죠. 바울(나)은 단 한걸음도 걸을 수 없는 상태가 되죠. 11절에서는 굳이 ‘다른 사람의 손에 끌려’라고 표현 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첫 단계는 바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무가치함=티끌) ’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라는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그 빛은 예수님의 영광이죠.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알게 되면 지금 까지 눈을 뜨고 살았다고 자부 했던 내가 완벽한 맹인이었다는 본질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이 세상에 대하여 눈을 감고 오직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만 살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10절 후반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네가 해야 할 것을 누가 이르리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아나니아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아나니아는 정확하게 성령님의 표지판으로써 선택받은 자들은 오직 성령께서 이끌고 가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조금 재미있게 설명드리면, ‘바울아~~~ 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오직 성령이 너를 이끌고 갈 것이란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울 뿐 아니라 지금 현재 ‘나’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입니다. 명심하십시오.
그래서 아나니아가 ‘경건한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직 경건한 분은 예수님(성령님) 밖에 없죠. 구약에서 모세, 노아, 욥 등등의 많은 선지자들이 등장할 때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호칭을 달아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롬3:10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언이 되어 있죠. 모순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복음의 눈으로 읽으면 정확히 알아듣게 되죠. 즉, 의로운 사람 욥은.... 이라는 뜻은 '이제부터 욥은 예수님(의인)의 표지판으로 잠시 등장할 거란다... 그 방향성으로 성경을 보아야 나의 의도를 알 수 있단다~~~' 라는 뜻입니다.
13절,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보라’ 이것은 지금까지 세상을 바라보던 잘못된 관점을 올바로 복음으로 다시 보도록 성령께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라고 기록이 되어 있죠. 즉, 성령께서 복음을 알려주시면 우리는 그 즉시 복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아아니아가 이렇게 말하죠.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부분은 바울의 성경 집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서신서 대부분은 바울이 집필한 것이죠. 물론 이 모든 것은 성령께서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도구로 사용되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14-15절은 조금 어렵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쉽게 다시 써 보면, ‘ 바울아 네가 복음을 알게 되었고, 의인 예수님을 보게 되었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는데 이것은 네가 예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란다~~’입니다.
마지막 16절을 보면,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하죠. 여기서 나온 ‘이름’이라는 단어가 바로 ‘정체성’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는 유독 ‘이름’이 많이 나오고 강조가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름이 정체성을 가리키는 표지판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경상의 인물들은 그 이름이 많이 바뀌죠. 사울이 바울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것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본주의에 묶여 있던 자가 복음의 진영으로 넘어온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죽은 자가 산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불러’ 다음이 ‘세례를 받고’입니다. 세례는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죠. 즉,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세례의식 자체는 표지판(그림자)일 뿐입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례의식은 구원을 설명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복음에 눈을 뜬 자들은 세례의식을 보면서 구원에 대한 설명을 알아듣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마지막으로 ‘너의 죄를 씻으라’고 합니다. 역순으로 말씀드리면, 우리는 죄를 씻기 위해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깨달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처럼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분을 직접 보여주시고 들려주셔야 하죠.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끌고 가시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즉, 우리가 관여할 부분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과정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아듣게 되는 것은 이 과정 중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면, ‘주저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구원의 긴박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긴박함은 복음의 주요 속성입니다. 즉, 복음을 대함에 있어서 늘 이 ‘긴박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령께서 선택받은 자들에게 복음의 긴박성을 유지시키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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