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사도행전21장부터 마지막 28장까지는 사도 바울의 죄인 여행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모함으로 인해서 로마인들에게 결박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까지 긴 여행을 시작하죠. 그 긴 여행 도중 계속 복음에 대한 메시지가 흘러 나옵니다.
이런 바울의 죄인 여행기는 정확하게 예수님의 여정을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질상 의인이지만 죄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죠. 그리고 그 분을 모함하고 박해한 것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형을 집행한 것은 로마인들이었죠. 성령께서는 이 과정을 바울을 통해서 다시 한번 사도행전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오늘 32절에서 보면,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많은 구타를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똑같이 채찍에 맞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심지어 35절에 보면, 바울은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갈 정도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습에서 바울에게 집중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의도가 아닙니다. 이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이런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떠올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채찍을 맞는 비참한 모습을 보이신 이유가 뭘까요? 영화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보면 주인공 예수님이 정말 많은 매를 맞는 장면이 나오죠.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영화로 지켜보면서 마음 아파하고 '나를 위해 저렇게 채찍에 맞으셨구나~'라는 슬픔에 빠집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인본주의 감상일 뿐입니다. (나를 위해, 우리 나라를 위해 이순신 장군이 저 배에서 저렇게 활에 맞아 피를 흘리셨구나~~ 와 같은 방향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비참한 모습을 보이신 것은 그 분 스스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우리의 참 모습을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우리의 본질이 이렇게 비참하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유대인들과 로마인들로 인해서 예수님은 매를 맞고 비참함에 처하게 되죠. 이 유대인과 로마인은 바로 '나'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중요한 부분이므로 다시 한번 설명해보죠.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가 된 상태가 되어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비참한 상태죠. 그런데 인간만이 그 사실을 모릅니다. 이런 인간은 인본주의라는 바벨탑을 쌓으면서 희희낙낙 살아가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본질인 비참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비참함에 처하게 된 이유는 바로 '나' 때문입니다.
원래는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것 그 자체가 바로 '비참함'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인간 중에 그것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없죠. 그래서 그런 비참함을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시기 위해 스스로 채찍을 맞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예수님은 '나'로 대표되는 유대인과 로마인들에게 채찍을 맞은 것입니다. 어렵죠? 어렵지만 꼭 이해가 되셔야 하는 부분입니다. 두 세번 읽어보세요. 이것이 이해가 되셔야 예수님의 정체성이 이순신과 부처를 뛰어 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바울)을 때리고 박해하는 이유는 바로 ‘모세의 율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만이 모세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내신 분이시죠.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율법 그 자체가 예수님입니다. 즉, 말씀 그 자체가 예수님입니다. 이것을 유대인에게 주었더니, 즉 예수님을 유대인에게 주었더니 유대인들은 율법을 그들의 기준으로 재해석한 것이죠. 그래서 '스스로 지켰다. 혹은 최선을 다해서 지키고 있다.'로 바벨탑을 쌓은 것이죠.
이것은 지금도 똑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말씀을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칼로 사람을 찔러서 생명을 빼앗는 것이 살인이다.’라고 그 수준을 바꾸어서 지켜내죠. 그래서 TV 뉴스에 살인자가 나오면 그 살인자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날 저녁 식탁에서 닭고기 한 점을 더 먹은 내 형제에게 화를 내죠.
이미 인간은 모두 살인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람만 죽일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까지도 살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그 대상이 예수님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편에서는 구원의 조건을 절대로 찾아 볼 수가 없죠. 그래서 오직 구원은 예수님의 선택에 국한된 것입니다.
그래서 10계명은 인간이 꼭 지켜야하는 계명이지만 절대 지킬 수 있는 계명이 아닙니다. 10계명의 참 본질은 인간이 절대 지킬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나열한 것입니다. 이 10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은 이렇게 절대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런데 평생 동안 교회에 헌신하고, 예배, 봉사, 헌금, 구제에 충실한 집사, 장로, 목사들에게 ‘당신의 모든 행위는 전부 다 가짜야~~ 이 위선자들아~~’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왜냐햐면 복음은 이 모든 행위가 무가치하다는 진리에 맞닥뜨렸을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되기 때문이죠. 내 행위의 무가치함이 철저하게 드러날 때 비로소 참소망이 예수님께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과연 ‘네~~ 맞습니다.’라고 인정할까요? 아니죠. 그렇게 말을 한 사람에게 돌(비판)을 던지게 됩니다. 그 과정이 정확하게 유대인(바리새인)과 예수님의 관계였죠. 그리고 그것은 나와 예수님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나를 위해 스스로 짐승(나)의 먹이(그래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심)로 오셔서 그분의 피와 살을 내어주시고 나를 그분의 지체로 만드셔서 구원을 하신 것이죠.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면서 '세상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세상에 살다가 교회에 등록하면서 '종교인'이 되죠. 그런 종교인으로 살다가 예수님에 대한 것을 배우면서 '예수님을 신으로 섬기는 신앙인'이 됩니다. 그러다가 많은 반성과 고찰을 통해 '좀 더 나은 신앙인인 바리새인'이 되죠. 세상사람, 종교인, 신앙신, 바리새인의 순으로 인본주의가 발전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으시죠. 즉, 이 네 종류의 사람은 전부 다 같은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죽어있는 자일 뿐입니다. 이것을 설명한 것이 바로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흙밭, 돌밭, 가시밭에 뿌려진 씨(예수)의 비유를 다 아시죠? 다 죽은 흙일 뿐입니다.
오늘부터 나오는 모든 바울의 죄인 여행기는 바울에 초점을 맞추면 안됩니다. 바울의 변명과 바울의 처한 상황을 통해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행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끝
P.S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시간 나실 때 마다 묵상하세요. 핸드폰에서는 첫 화면 중간에 보시면 “분류 전체보기”를 보시면 됩니다. )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과 공휴일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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