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오늘도 '사도의 행전'을 '성령의 행전'으로 보시면서 성령님의 의도를 잘 읽어 내셔야 합니다. 사도행전이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드디어 성령께서 바울에게 계시한 대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을 했습니다. 오늘 마지막 30절에 보면, 결국 성령의 계시대로 바울은 결박당하게 됩니다. 그 장면을 하나하나 묵상해 보죠.
예수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그동안 이방 가운데서 행한 모든 사역을 낱낱이 보고합니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20절에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라고 나와 있습니다. 분명히 이들은 복음의 진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즉, 선택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그다음 장면이 매우 이상합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하죠. 21절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우리는 이제 이 어려운 21절을 해석해 내야 합니다. 과연 이 21절이 가지고 있는 역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조금 쉽게 풀어보죠. 이 21절의 의미는 ‘복음을 설명할 때 그 복음은 필연적으로 역설을 포함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어렵죠? 조금 돌아가더라도 너무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설명을 해볼께요.
안식일을 예로 들어보죠. 안식일의 정체성은 예수님이라고 말씀드렸죠! 즉, 안식일을 지켜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은 예수님의 지체로 남아 있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예수님의 모형인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목숨 걸고 지켰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는 아직 그 안식일의 실체인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이므로 그 실체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없어지면 길을 제대로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죠. 그래서 모든 표지판은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즉, 표지판이라는 네비게이션이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미 실체가 우리에게 도착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표지판(그림자)에 매달려서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고 심지어 그 일요일을 ‘주일성수’라고 성스럽다고 치장까지 해서 종교화 시키는 것이 바로 지금의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소수의 선택된 자들은 복음을 알게 되어 이러한 진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주일성수’를 지적하죠. 그러나 복음의 눈이 열리지 않은 자들은 ‘이 사람들은 이상하다~~~ 주일을 지키지 말라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수박의 본질이 빨간색이라고 설명을 하고 그 빨간색 부분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권유하지만 그 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수박은 오직 초록색이라고 고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묵상의 포인트입니다. 전체적인 줄거리이기도 하고 21절이 갖고 있는 역설을 설명할 수도 있죠.
그래서 그들은 바울에게 ‘너도 결례를 행해라~~’라고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것을 그대로 행하죠. 이것도 역설의 역설입니다. 어려워 집니다. 잘 따라오세요. ( 너도 일단 수박의 겉 면이 초록색이라고 동조를 하거라~ 는 뜻이죠.)
복음에 있는 자들은 이미 자유합니다. 주일성수를 하던, 말던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복음을 아는 자들은 절에 가서 부처에게 108배를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의미가 무가치하다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제사상에서 절대 절하지 말자'의 의미를 '제사상에서 귀신에게 절하면 큰일 난다. 율법을 어기면 지옥 간다.'로 알고 절을 하지 않는 행위를 지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우상의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우상의 존재에 영향을 받는 것이죠. 어렵죠? 글쓴이는 뭐야? 그럼 절을 하라는 것인가?라는 비판을 하겠죠. 그러면 우리는 다시 수박의 빨간색과 초록색 논쟁이 벌어집니다. 수박의 안쪽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자들에게 수박의 본질이 빨간색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류는 역사적으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구는 평평하고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믿었죠. 심지어 이것을 부인하는 자들을 화형시켜버렸습니다. 이런 역사가 전체 역사의 90%를 차치하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님께서 '과학'이라는 것을 허락하셔서 우리는 참 사실을 알게 되었죠. 즉, 과학이 발달하는 목적은 '우리가 더 잘 살게 되자'가 아니라 '우리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즉, 과학은 이 세상을 더듬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도구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은 여기서 그 자유를 조금 더 유익하게 사용한 것뿐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쓸모없는 분쟁을 피한 것이죠. 수박이 초록색이라고 말하고 있는 자들에게 '그래~ 수박은 초록색이기도 해~~~'라고 인정하는 과정을 선택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율법에서 자유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죠.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 번 역설의 역설의 역설이 나오게 됩니다. 즉, 성령께서는 바울과 복음의 진영에 있는 사람들의 이러한 유익한 결정을 다시 한번 완벽하게 깨뜨려 버리십니다. 어려워지시죠? 잘 따라오고 계시리라 생각하고 계속 해석을 해 나가겠습니다.
27절 보면,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무리를 충동하여 바울을 결박합니다. 심지어 30절에서는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라고 표현이 되어 있죠. 여지없이 복음의 진영에 있던 사람들과 바울이 결정한 유익한 결정이 박살 나게 됩니다.
즉, 이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보면, 성령께서 사용한 유익한 도구는 '행위에 묶여 있던 유대인들'이고 반대로 성령께서 사용한 해로운 도구는 '유익한 결정을 한 자들과 바울'이었습니다. 즉, 복음이 가리키는 방향은 '결례를 따르자는 결정을 내린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이해가 됨'이 아니라 '바울의 결박'입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도 다르죠? 인본주의 인과율에 묶여 있는 우리는 이러한 전개를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오직 성령께 이끌고 나가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제대로 읽게 되면 우리는 단 하루의 미래도 예측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한 예측이 얼마나 미련한 것이지 알게 됩니다.
“마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
이 구절도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오해하는 구절이죠. 이 구절에서 ‘내일’라는 부분을 오역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내일’의 품사는 부사가 아니라 주어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염려하지 말고 내일 염려하자’라는 뜻이 아니라 ‘나의 염려는 내일이라는 주어가 맡아 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더 정교하게 해석하면, ‘나의 염려는 내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맡아 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바울과 복음의 진영에 있는 사람들의 모든 염려가 그들의 계략으로 어찌 어찌 벗어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결국 성령님의 계획은 한치의 흩트림도 없이 바울의 결박으로 진행이 되죠!
우리의 인과율로 성경과 인생을 해석하면 절대 안됩니다. 오직 성령님의 섭리하심만을 따라가십시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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