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완료)

창42:1-8(23.06.26.월)

은혜바라기 2023. 6. 26. 08:33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오늘 부터 요셉과 이스라엘(야곱의 아들들)의 양식 밀당 에피소드가 진행됩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표지판이고 이스라엘은 교회의 표지판입니다. 또한 ‘양식’도 예수님의 표지판입니다. 

 주기도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 가운데 나와 있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이 일용할 양식을 가운데 두고 그 위, 아래로 샌드위치처럼 일용할 양식을 설명하는 빵이 배치된 것이죠. 그래서 이런 구조를 샌드위치 구조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기된 자들은 주기도문을 외울 때 ‘일용할 양식’을 읍쪼리면서 ‘오늘도 제가 사용할  의, 식, 주를 채워주소서’ 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조금 더 겸손이라는 외식을 추가하여 ‘제가 사용할 의, 식, 주를 하루 쓸 만큼의 검소한 정도로는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면서 ‘나는 이 정도로 욕심을 내려놓는 사람이다.’라고 스스로 칭찬도 하죠.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이 ‘일용할 양식’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챕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저를 먹이셔서 저를 품고 가소서’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애굽에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요셉과 양식이 존재하죠. 이 상황으로도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천국이 장소의 개념이었다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은 절대 기근이 들면 안됩니다. 그리고 이방 땅 애굽은 양식이 넘처나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되죠.  하지만 요셉과 관계 맺음이 곧 구원(천국)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가나안은 기근이 들게 되죠.  (요셉은 예수님의 표지판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요셉 + 양식’을 구하러 갑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런 포맷을 사용하신 이유는 우리가 ‘가나안’이라는 땅에 너무 매몰되어 ‘가나안이 천국이다.’라는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중요하니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가나안은 천국이 아니라 천국을 설명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천국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표지판 요셉이 애굽에 있기 때문에 천국은 애굽이 되는 것입니다. 즉,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요셉과 관계 맺음, 즉 예수님과 관계맺음이 천국의 개념입니다. 이런 에피소드가 왜 중요할까요?

 이 부분을 현재 우리에게 적용하면, '지상교회' 혹은 '기독교'에 매몰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에서 '생명'으로 나가가야 하죠. 하나님은 '종교'를 만드신 적이 없습니다. 종교는 죄인된 인간이 만들어낸 인본주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종교를 도구로 사용(허락)하여 복음을 설명하시는 것이죠. 구약의 모든 율법도 사실 예수님을 설명하는 문장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매우 강한 종교적인 색채를 입고 다가온 것뿐이죠. 

 

 당연히 어떤 사람도 '종교'라는 그물 밖에서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교회와 기독교라는 도구를 통해 복음을 알아갈 수 밖에 없죠. 그러나 그 도구가 최종 목표가 되거나 그 도구가 엉뚱하게 가리키는 사람과 프로그램 그리고 행위(공로)에 매몰되서는 안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면,  그래서 이스라엘은 요셉과 양식이 있는 애굽을 향해 떠나죠. 그런데 야곱은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보내지 아니합니다. 본문에서 베냐민을 요셉의 아우라고 특정하고 있죠. 그래서 베냐민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요셉은 이스라엘이 양식을 제대로 얻으려면 반듯이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복음으로 풀어보면, 교회가 구원을 얻는 것은 교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듯이 성령님이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후 이스라엘, 즉 요셉의 형제들은 애굽에 있는 요셉을 만나게 되죠. 그런데 요셉은 형들을 알아 보았지만 그 형제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나옵니다.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는 그분께서 선택하신 그분의 백성(교회)을 모두 알아볼 수 있지만 교회는 예수님의 허락이 없는 한 스스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복음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다시 성경을 잘 보세요.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자기들의 형제(같은 몸)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는 인식하고 있습니다. 즉, 유기된 자들도 교회에서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예수님이라는 신’으로 인식하고 얼마든지 그 예수가 자기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섭죠? 

 그러나 진정한 구원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구원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법, 즉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여 우리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볼 수 있는 과정으로 이루어 나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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