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고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이제 명령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 오라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새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더니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오늘 말씀 14-15절을 보면, 드디어 요셉이 베냐민과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히고 그들과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죠.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성령님이 이끄신 교회와 한 몸이 되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식이 애굽 왕 바로에게 들리자 바로는 요셉의 형제들에게 길에서 먹을 양식과 옷을 수레에 실어 주고 또한 그 아버지 야곱에게도 갖가지 좋은 것을 수레에 담아 보냅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데려오면 좋은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죠. 하나님께서는 이 부분에서 무엇을 설명하시는 것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복음의 큰 줄거리를 한번 살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구원을 받았을까요? 의미적 순서로는 창세 전입니다.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 엡1:4절은 복음의 원리 중 가장 앞선 원리입니다. 꼭 숙지하세요.
'시간'이라는 피조물에 속지 마세요. 우리와 하나님의 시간은 반대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과거>> 현재 >> 미래 의 순서로 진행되죠. 그래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염려로 전 인생을 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모든 시간이 복음 안에서 완성된 후 실타래처럼 풀어져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창세전에 선택받은 백성이 된 이유, 즉 구원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엡1:4)과 그의 기쁘신 뜻(엡1:5)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조건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죄인된 인간은 이 부분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엡1:5절에 보면,
“엡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 불가능함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류의 역사에 등장하셔서 선택받은 백성을 찾아서 구원을 하시게 되죠.
고로 창세 전에 이미 선택받은 백성은 잠시 이 땅에 내동댕이 쳐져서 하나님께 ‘예수님의 복음’을 설명받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복음)을 인생의 시간 동안 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천국 >> 땅(지옥) >> 다시 천국”이라는 메커니즘을 계속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노아의 방주 사건 이후 모든 사람을 방주(천국)에서 꺼내어 다시 땅(지옥)에 풀어 놓은 후 나중에 ‘아브라함(선택받은 자의 표지판)’을 불러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천국)으로 불러오죠.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천국)에서 애굽(지옥)으로 이동 시켜 400년간 종살이를 시킨 후 나중에 모세로 하여금 다시 가나안(천국)으로 돌아오게 하죠. 이후 이스라엘의 왕조 시대에도 이스라엘 땅(천국)에서 쫓겨 나서 바벨론(지옥)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다시 이스라엘 땅(천국)으로 귀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시대에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아래의 모든 아기를 다 죽이죠. 이때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난을 갑니다. 이후 헤롯이 죽자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죠. 이 모든 장면이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인생의 정체성"입니다. 창세전 선택받은 백성이 이 땅(지옥)에 잠시 왔다가 다시 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모든 에피소드가 똑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죠? 하나님께서 계속 이렇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시는 이유를 아셔야 합니다. 특히 그 당시 2살 아래의 모든 아기를 다 죽이는 사건까지 허락하시면서 만들어내진 그 에피소드는 모두 같은 방향성을 설명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도 이 방향성을 유지한 채 해석하셔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잔뜩 주면서 애굽으로 불러들이는 것과 예수님 시대에 헤롯이 2살 아래의 모든 아기를 다 죽여서 예수님이 애굽으로 들어가신 것은 완벽하게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에피소드를 우리의 ‘선, 악’을 가지고 판별을 하기 때문에 그 안에 진짜 녹아있는 복음을 보지 못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의 말씀 포인트는 정말 간단합니다. 선택받은 백성은 애굽(인본주의 세상)에서 포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한몸이 된 이유에 대하여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 여기서 한가지 덧붙이면 오늘의 에피소드에서는 바로가 갖가지 좋은 것들을 주면서 이스라엘을 불렀죠.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받는 삶을 살게 되는데 이렇게 받는 고난은 사실 매우 ’귀중한 가치‘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선택받은 자들은 오직 예수님을 유일한 가치로 보기 때문에 예수님을 설명하는, 혹은 복음을 설명하는 모든 것이 귀중한 가치가 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을 잘 살게 해주는 모든 것을 귀중한 가치로 여기죠. 이 부분이 정말 정말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 부분이 '구원의 증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이 세상의 가치가 마음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갑니다. 그것을 "심령이(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예수님만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죠.
그런데 선택받지 않은 자들 중에도 교회의 제도 안에 들어 와 있는 자들이 많죠. 그들은 자신들이 잘 살기 위해서(혹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 : 죽어서도 잘 살려고) 예수라는 신을 믿는 방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을 '종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가치가 마음에서 점점 상실되면서 "예수님"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세계관을 이해시키는 방향으로 끌고가죠. 정말 다르죠? 그래서 모든 사람은 기독교라는 '종교'로 첫 계단을 밟지만 그 중 선택받은 자들만 결국 그 '종교'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과정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갈등과 고민이라는 고난을 통해 오게 됩니다. 너무 복음을 만만하게 보시면 안됩니다. 그래서 심지어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죠.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오늘 말씀 마지막 28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로 끝을 맺죠. 즉, “죽기 전에 예수님을 보는가? 못 보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인생의 가치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계획대로 공부를 하고 열심히 일을 하고 많은 사람을 도와준 하루를 보낸 후 집에 와서 가족들과 정겨운 저녁식사를 하고 자녀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뿌듯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 사람의 하루를 ‘복음’의 관점에서 평가하면 ‘방탕한 삶’입니다. 방탕이란 히브리 의미로 ‘낭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낭비했을까요? ‘복음을 알아가는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 시간들은 모두 낭비한 것입니다. 헛된 것이죠.
반대로, 전날 계획한 것을 다 지키지 못하고 속상해서 저녁 내내 술 먹고 자책하다가 문뜩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그래서 예수님이 나로 오셨겠지~~~’을 알게 되었다면 이 사람의 하루는 ‘온전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 다윗과 같이 밧세바를 간음하고 그 남편을 살해를 해야하는 환경이 필요합니다. 이후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복음이 필요한 자였구나~~"를 알게 되면 그 삶은 '악한 삶'이 아니라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상징 솔로몬이 그렇게 간음으로 취하 밧세바에게서 잉태된 것이죠. 이 역설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 세상의 관점으로는 '악'이지만 복음의 세상에서는 '선'일 수 밖에 없는 이 '역설'을 '정설'로 바라보는 자들이 바로 '선택받은 자'가 되죠.
이 두 가지 삶의 평가에 대하여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절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복음의 진영에 있는 사람들만이 납득하게 되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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