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완료)

창46:28-34(23.07.12.수)

은혜바라기 2023. 7. 12. 08:56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오늘의 주제는 두 개입니다 첫째는 인본주의 세상에 살아가는 선택받은 자들은 이 세상과 결국 분리될 수 밖에 없다는 것과 둘째는 요셉과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만남입니다. 

 28절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제부터 애굽에 살게 되겠지만 애굽 사람들과 분리되어 살 수 있도록 ‘고센’지방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요셉도 마지막 34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바로에게 ‘우리는 목축하는 자들입니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목축을 가증하게 여겨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분리하여 고센 땅에 살게 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성경은 '분리'를 강조할까요? 성경에서 나오는 거룩, 청결, 정결, 성결 이 모든 말들은 모두 '분리'를 의미하는 단어들입니다. 우리 몸에 묻은 오물을 물로 씻을 때 우리와 오물은 '분리'가 일어나죠. 우리에게는 '구원'이고 오물에게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신본주의)의 방향성에서 오물은 '인본주의'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인본주의와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으니 너희도 인본주의와 분리되어야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산상수훈으로 처음 시작할 때 첫 구절이 ‘심령(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것임이요.’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가치 추구’를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돈과 재물, 지식과 학력, 권력과 인기, 인간관계와 가족 등등의 가치가 최고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마음에 품고 노력하게 되죠. 그런데 선택받은 자들은 자연스럽게 이 모든 것이 가치없다는 진리를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마음에 품고 있던, 바라고 있던 모든 가치가 상실됩니다. 정확하게는 나의 옛 자아는 인본주의 가치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거듭난 나는 복음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면서 갈등하는 구조가 되죠. 이후 나는 이 구조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해결방법으로 오직 예수님만 소망할 수 밖에 없다는 방향성을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자들 각자의 특성에 맞추어서 어떤 자들은 단 한 번의 큰 고난으로, 어떤 자들은 천천히 복음을 알아가는 방식으로, 어떤 자들은 오히려 인생의 꿈을 다 이루게 하여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어떤 자들은 오히려 그 꿈을 절대 이루지 못하게 하여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방식으로 섭리해 나가시죠. 그러나 공통적으로 점점 더 이 세상의 모든 가치가 상실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살지만 그들과 분리되어 '고센'에 머무는 이방인이 되어갑니다. 

 이렇게 마음에 이 세상의 가치가 점점 없어지는 상태를 ‘마음이 가난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실제로 살아가는 희망도 없어지고 재미도 없어지고 슬프고 애통한 상태만 남게 되죠. 하지만 이때부터 예수님께서 복음으로 위로가 시작이 됩니다. 나와 예수님 둘만의 관계 속에서 평강과 행복을 누리는 방법을 알아가게 되죠. 그러나 인본주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 이 둘을 동시에 누릴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 똑똑한 종교인들이 복음을 대할 때 이 방법을 사용합니다. 적당히, 다 누리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을 안전하고 지혜롭다고 스스로 생각하죠.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재물'은 결국 '가치'를 말합니다. 즉 인본주의 가치를 말하고 있죠.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소유하고 그것에 묶이고 그것을 추구하지만 반대로 선택받은 자들은 이 세상과 계속 분리되어집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본주의와 분리되는 자들을 이 세상 사람들은 ‘가증히 여기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을 하고 계시죠. 

 

 복음에 눈을 뜨고 교회를 다니게 되면 참 괴롭습니다. 전에는 듣기 좋았던 설교가 이제는 듣기가 힘들어지고 전에는 나를 위로 해 주었던 성도와의 교제가 오히려 부담스러워지죠. 그러면서 심지어 외로워지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외로워진다는 것은 결국 '분리'를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선택받은 자들이 '종교'로부터 분리되어 '생명'으로 나아가는 필연적인 과정이죠. 

 

  교회가 예수님을 말하는 것 같지만 대부분은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모른채 그냥 '예수님'이라는 3글자를 지닌 '인본주의 종교로써의 예수님이라는 신'을 이야기하고 있죠. 그분은 그냥 나를 위해 존재하는, 즉 나를 잘 살게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그냥 '신'일 뿐이죠. 이것을 '종교'라고 합니다. 그냥 '종교적인 신'으롰의 예수님을 교회가서 주여~~ 주여~~~ 라고 부르는 것 뿐입니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하나님은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라고 하신 것이 바로 십계명의 제 3 계명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예수님 한 분을 가리킵니다. 즉, 그분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분이죠. 우리는 그 분의 지체가 되어 댓가 없이, 하나님의 긍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정체성 중 하나죠. 

 
 하지만 잘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과 등지고 교회를 가지말고 성도와 교제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선택받은 자들도 이 세상과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애굽에서 애굽사람들과 끊임없는 교제를 해야하죠. 단지 그러면서 그런 나를 이 세상과 분리하여 볼 수 있는 시각을 성령께서 견인하여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즉, '고센'은 바로 '성령의 품'입니다.

 

 '인본주의와 분리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보자' 하고 산속으로 들어가고 이 세상 사람과 등지고 사는 노력의 방향성은 매우 잘못된 방향성입니다. 만약 인본주의와 분리하는 노력을 하기 위해서 도시에서 떠나 산에 교회를 짓고 그곳에서  사람이 아닌 벽만 바라보면서(면벽) 아무도 없는 마당을 빗질하면서 고민하고 이 세상에 내 외모는 필요없다고 머리를 다 깍고 무소유를 천번씩외친다고 해보죠.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종교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불교'죠. 그래서 실제로 불교는 예수님만 없을 뿐이지 이 세상의 본질을 정확히 꽤 뚫고 있는 최상위 철학을 가지고 있죠. 

 

 우리는 옛 자아와 함께 애굽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종교인들이 득실거리는 교회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적 의식도 참여하십시오. 그런데 선택받은 자들은 그런 모든 것들이 영양분(도구)이 되어 끊임없이 예수님의 필요성을 알아가게 됩니다. 

 

 또한 29-30절에 보면, 드디어 요셉과 야곱이 만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야곱은 성부하나님의 표지판이고 요셉은 예수님의 표지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정체성은 예수님 한 분이 아니죠. 교회를 모두 품고 계신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만나 목을 안고 울며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사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나를 다시 만날때의 심정도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한몸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없이는 절대 ‘선택받은 나’라는 존재를 있을 수가 없고 ‘나’라는 존재없이는 절대 ‘예수님’이 존재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정체성은 그 분의 품안에 내가 들어가 있는 예수님이라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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