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완료)

창47:13-31(23.07.14.금)

은혜바라기 2023. 7. 14. 08:58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가니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떨어진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이르되 돈이 떨어졌사오니 우리에게 먹을 거리를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요셉이 이르되 너희의 가축을 내라 돈이 떨어졌은즉 내가 너희의 가축과 바꾸어 주리라
그들이 그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끌어오는지라 요셉이 그 말과 양 떼와 소 떼와 나귀를 받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되 곧 그 모든 가축과 바꾸어서 그 해 동안에 먹을 것을 그들에게 주니라
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 무리가 요셉에게 와서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께 숨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의 돈이 다하였고 우리의 가축 떼가 주께로 돌아갔사오니 주께 낼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과 토지뿐이라
우리가 어찌 우리의 토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며 토지도 황폐하게 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요셉이 애굽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으나
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 바로가 주는 녹을 먹으므로 그들이 토지를 팔지 않음이었더라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기근을 피하여 가나안에서 나와서 애굽 땅 고센지역 라암셋에 정착을 하게 되고 요셉은 그런 이스라엘을 봉양하게 됩니다. 즉, 예수님의 표지판인 요셉이 교회의 표지판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13절을 보면, 근방에 있는 모든 지역은 점점 더 심한 기근에 시달려서 요셉에게로 가서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주고 식량을 사죠. 이후에는 가지고 있는 모든 가축으로 식량을 삽니다. 이후에는 가지고 있는 땅과 자기 자신을 종으로 주고 식량을 사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의 모든 땅을 사서 바로의 소유로 삼고 이후 애굽의 모든 백성을 바로의 성읍들로 옮기죠. 

 이 에피소드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고난’을 통해 선택받은 사람을 예수님의 소유로 이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의 지체가 되는 것이죠. 어렵지 않죠?

 그래서 23-25절까지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교회를 사게 되면 교회는 예수님의 소유, 즉 예수님의 지체가 되어 예수님과 천국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24절에 나온 ‘5분지 1’에서 ‘5’는 말씀을 의미하고 ‘1’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5분지 1'이 의미하는 것은 '말씀되신 하나님'을 의미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완전되려면 예수님이 하나님께 상납되어야 하는 것과 우리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의미하는 구약의 유월절 규례를 살펴 볼까요? 

 유월절은 1월 10일 어린양을 선택한 후 1월 14일 저녁에 그 양이 흠이 없다고 판단 되면 잡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재물로 오셔서 흠 없이 율법을 지키고 완성하신 후 십자가 사역을 마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저녁’은 인본주의를 의미하죠. (빛이 없는 시간)

 이후 어린 양의 피와 살을 발라서 어린 양의 피는 문설주에 바르고 어린 양의 살은 구워서 아침이 되기 전까지 먹되 남기거나 저장하면 안됩니다. 남으면 불살라서 없애 버려야 하죠. 어린 양의 피와 살을 바르는 행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행위는 예수님의 피로 죄인을 덮어서 심판을 지나가게 하여 살리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어린 양의 살을 불에 구워서 먹는 것은 말씀이 교회의 양식이 된다는 것인데 여기서 ‘불’은 ‘정화’의 의미가 있습니다.

 '정화'는 죄를 없애버리는 것인데 죄를 없애버리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님'뿐이죠. 그래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모든 것이 바로 '정화의 과정'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시죠. 정확하게는 그 말씀의 본질인 '복음'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그 말씀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그 말씀의 포장지만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훈, 율법, 종교에 머물죠. 율법 상 절대 재물의 고기를 날 것으로 먹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있는 그대로의 말씀(날 것)으로만 읽게 되면 절대 복음으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의 교훈적, 종교적 의미는 꼭 선택받은 자들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님과 무당들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스님들이 설법을 할 때 '서로 사랑하라' 라고 설법을 하거나 심지어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헌신이라는 주제로 설법도 하시죠. 그러나 그들은 그냥 글자 그대로의 “날 것”으로만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성경은 교훈, 종교, 율법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불에 구운 말씀’ 즉, 성령의 정화를 거친 본질적이 말씀인 복음은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 알아듣게 되죠. 그래서 이런 특성이 바로 '방언의 특성'이라는 것을 사도행전에서 잠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는다는 의미죠. (그랬더니 자신도 못 알아듣는 랄랄라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주문을 외우면서 종교활동을 하고 있죠.)

 또한 아침까지 먹다가 남으면 절대 남기지 말고 불태워 버리라고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은 오직 하나님이 정해놓은 시간과 선택받은 백성에게만 해당된다는 의미입니다. 먹지 말아야 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무 때(시간)나 막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죠.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 22절을 보면 조금 이상한 구절이 나옵니다. 요셉은 모든 애굽 백성과 그 땅을 전부 사들여서 바로에게 귀속시키죠. 즉, 예수님께서 그 분의 백성을 전부 십자가로 사서 성부 하나님의 세상(천국)에 귀속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22절 보면, 요셉은 애굽 제사장들의 토지는 안 삽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바로의 녹을 먹기 때문에 그들은 토지를 팔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의 해석이 매우 어렵습니다.(난이도 최상) 여기 나온 ‘제사장’은 종교인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녹을 받고 있다고 생각’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땅, 즉 나의 옛 자아를 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것은 매우 무서운 말입니다. 간혹 어떤 교회를 가 보면 목사를 '하나님의 사자' 라고 하죠. 목사가 하나님께 영적인 것(녹)을 직접 받아서 그것을 교인들에게 먹인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께 자신을 팔지 못합니다. 즉,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특별한 소명을 받아서 선교사를 한다는 생각 자체도 무척 무서울 수 있는 말입니다. '특병한 소명'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내가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라는 것은 모두 '착각'입니다. 내가 종교적으로 우뚝 서고 싶고 예수님의 소명에 한 숫가락 공로를 얹고 싶은 나의 옛 자아의 욕망을 그렇게 포장하는 것 뿐이죠. 그나마 진정한 선교사를 알고 싶으시면 이런 것을 알고 선교를 하시는 분을 찾을 것을 추천드립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선교하라고 했더니 계속 도망만 치다가 결국 끌려가죠. 거기서 3번을 전도하라고 했더니 너무나 하기 싫어서 한번만 외치고 돌아서죠. 그냥  억지로 '믿던지 말던지~~ 난 다 말했다~~' 라고 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니느웨의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죠. 이것이 선교의 본질입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죠.

 

  [[ 아마도 여러분이 선교사들의 현실을 아시면 멘붕에 빠질 것입니다. 수 년 동안 선교사 생활을 하게 되면 정말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 후원금 쟁탈전에 빠져들고 말죠. 몇 분에게서 그 쟁탈전의 심리 싸움까지 듣고 있자면, 그냥 세상과 똑 같습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계셔야 합니다. --------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 소명은 오직 예수님께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 

 

 

P.S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시간 나실 때마다 묵상하세요. 핸드폰에서는 첫 화면 중간에 보시면 “분류 전체 보기”를 보시면 됩니다. )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이 말씀의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니라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버립니다.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날을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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