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완료)

창47:1-12(23.07.13.목)

은혜바라기 2023. 7. 13. 08:21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그의 형들 중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 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


 어제의 주제와 동일한 주제가 오늘도 반복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에게 ‘목축업’을 한다고 하자 바로는 그들에게 ‘고센’ 땅에 분리하여 살라고 하죠.(11절의 ‘라암셋’은 고센 지방 안에 있는 도시 이름입니다.) 이때 요셉은 그 형제 중 ‘다섯’을 바로에게 보이고 그 다섯 형제가 바로에게 자신들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성경에서 5라는 숫자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율법’을 의미하죠. 그래서 말씀(율법)이 이 세상에 드러나니 이 세상의 왕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리, 배척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은 ‘인본주의’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의 옛 자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탄, 인본주의, 나의 옛 자아 이 셋의 관계를 조금 깊이 묵상해 보죠. 

 창세기 초반을 보면, 뱀이 하와를 현혹하여 죄를 짓게 만들죠. 그런데 그것은 결과론적으로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에피소드로 풀어서 보여주는 것 뿐입니다. 하와가 현혹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하와가 ‘죄인’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개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인이 될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죠. 그리고 ‘죄’라는 개념은 ‘하나님과 분리됨’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만드신 이유는 인간을 로버트나 애완동물로 여기지 않으시고 하나님과 같은 격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물론 신분은 피조물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그 격을 하나님의 오른쪽 자리에 앉아서 같은 밥상에서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격으로 만드신 것이죠. 사랑의 대상이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필수적으로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는 의지조차 같이 창조된 것입니다. 

 여기에 사탄, 뱀, 선악과, 율법, 천지창조 등등은 모두 죄인 된 인간에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신 도구가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이제부터 ‘나’ 혹은 ‘인간’을 위해 살아가죠. 그것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본주의의 본질은 ‘나’입니다. 그 ‘나’가 확장된 개념이 ‘인본주의’가 되죠. (그래서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는 모두 인본주의 개념입니다. 개인주의가 인본주의 출발 개념이라면 전체주의는 인본주의 확장 개념이죠)

 그런데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될 수 있는 창조물이 있을까요? 없겠죠. 그래서 영적 모순이 생겨버립니다. 그런데 이 영적 모순은 ‘사탄’이라는 존재로 해결이 됩니다. 하나님과 반대편에 사탄이라는 영적존재을 배치에 놓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반대편’이라는 영적 모순이 해결되는 것이죠. 그러나 ‘사탄’도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탄, 인본주의, 나의 옛 자아는 모두 하나님과 반대편이라는 같은 구조를 공유하죠. 

 종교에 관한 것도 잠깐 살펴 볼까요? 모든 종교는 전부 인본주의의 가장 최상위 꼭대기에 위치합니다. 모든 종교에서 섬기는 ‘신’의 정체는 사실 ‘나’입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자들은 ‘나’를 믿죠. 그들은 ‘내가 열심히 살면 된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노력, 열심, 성실을 믿고 쌓게 됩니다. 그런데 종교도 그 원리가 똑같습니다. 인간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만 대개는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절대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죠. 그래서 마음속으로 ‘염원’을 하죠. 그 염원을 눈에 보이도록 구체화시켜서 나의 외부로 꺼내어 ‘사물화’시킨 것이 바로 모든 종교가 믿고 있는 ‘신’의 정체입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뽑아서 나의 소망을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 노래를 잘하는 인기가수를 우상화하여 동질감을 느끼면서 그 감정의 일부 느껴 보는 것 이 모든 것도 결국 다 ‘종교’와 비슷하죠. 

 성경은 완벽하게 이분법적으로 이 세상을 설명합니다. 하나님 편, 하나님이 아닌 편입니다. 이것을 양과 염소, 혹은 오른 쪽과 왼쪽 등등으로 설명을 하죠. 이렇게 하나님이 아닌 편을 설명할 때 영적으로는 ‘사탄’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게 되는 것이고, 이 세상 전체로 보면, ‘인본주의’라는 도구를 사용하게 되는 것이고, ‘나’로 보면, ‘나의 옛 자아’를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살게 되지만 ‘고센’이라는 특별한 지역에 분리되여 살게 되죠. 선택받은 자들이 이 세상에서 유기된 자들과 함께 살지만 그들의 삶은 완벽하게 분리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같은 식당에서 같은 밥을 먹어도 유기된 자들은 ‘맛있다.’의 방향성만 가지게 되지만 선택받은 자들은 그 음식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보게 됩니다. 

 7절-10절을 보면, 야곱이 이방인의 왕 바로를 왜 축복했는가? 어떻게 한낱 노인이 제국의 황제를 축복하는가? 이런 개연성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7절에서 ‘축복’이 나았고 10절에서 ‘축복’이 나왔죠. 성경에서 ‘축복’은 ‘복음’을 이야기한다고 했죠. 그래서 이 에피소드의 위, 아래 축복으로 담아낸 중심 내용으로 ‘야곱의 인생’이 복기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지금 ‘야곱의 인생’을 가리키는 9절을 오직 복음으로만 해석하라고 길 안내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정체선은 교회, 즉 ‘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9절을 복음으로 해석하면, 나는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머무르거나 쌓는 자가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는 자입니다. 이후 130년을 살죠. 100은 완전수고 3은 복음(하나님의 숫자)의 숫자죠. 그래서 연결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삶면서 복음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험악한 세월을 보낸다고 하죠. 고난과 고통의 삶을 살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내 나이가 얼마 되지 않는다’라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긴박함을 가리킵니다. 인생에서 고난과 고통이 길게 느껴질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음을 알아가는 과정을 가장 빠르게 성취해 나가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48:1-22(23.07.17.월)  (1) 2023.07.17
창47:13-31(23.07.14.금)  (1) 2023.07.14
창46:28-34(23.07.12.수)  (1) 2023.07.12
창46:1-27(23.07.11.화)  (1) 2023.07.11
창45:14-28(23.07.10.월)  (1) 2023.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