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완료)

계2:16-17(24.07.16.화)

은혜바라기 2024. 7. 16. 08:05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교회 생활을 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회개하라’입니다. 하지만 이 ‘회개’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회개란 단순한 반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눈을 뜬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학교 수련회나 새벽 예배에 가면 울면서 용서해 주세요~~라는 기도 장면을 많이 목격합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은 교회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절과 이스람 사원에도 가도 많이 볼 수 있죠. 심지어 초등학교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니라 반성입니다. 

 반성은 내가 잘못한 '행위'를 변화시킬 수 있고 앞으로 더 좋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다짐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회개는 반성과 정 반대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개는 내가 잘못한 것을 돌이킬 수 없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고 의지하는 방향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받은 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회개 증상이 나타납니다. 나의 죄됨, 나의 무능력, 나의 무가치함이 발견 되면서 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방향성을 가지게 되죠. 

 보통 술, 담배를 하다가 교회와서 그것을 끊으면 좋은 사람(좋은 신앙인)이 된 것으로 착각을 하면서 '나는 회개하였다~~'라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을 경고한 비유가 한 마리의 귀신을 내보냈더니 일곱 귀신이 들어온 비유입니다. 인본주의 악을 끊으면서 자기가 좋은 사람이 된 것으로 착각하여 인본주의 선을 행하게 되는데 이 인본주의 선이 마음 안에 가득하면 그때야말로 예수님의 가치를 소망할 수 없게 되면서 구원의 끈이 사라지죠. 그래서 '인본주의 선'을 한 마리 귀신 보다 훨씬 강력한 일곱 귀신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람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오직 죄인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명령같이 보이는 16절 ‘회개하라’의 본질은 성령께서 선택받은 자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하여 자신의 죄를 보게 하여 예수님만 볼 수 있도록 견인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것이 선언된 순간 이미 과거, 현재, 미래에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받은 자들은 삶 속에서, 묵상을 통해, 끊임없이 회개 증상이 일어납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회개는 나의 정체성(죄인)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방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16절 문맥을 보면, ‘회개하라 그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운다’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참 요지는 우리는 절대 스스로 회개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분의 입의 검(말씀, 복음)으로 나의 회개를 이끄신다는 의미입니다. 

 17절 중반, ‘감추었던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시절 오직 만나만을 소망하면서 하루를 지냈던 것을 기억하시죠? 마찬가지로 선택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흰돌’은 당시 재판에서 무죄로 판결받은 자들에게 주던 증명서였습니다. 반면 검은 돌을 받으면 유죄가 되죠. 그런데 그 흰 돌에 나의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을 기록한다고 하죠.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죄인이었던 나의 옛 자아는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함께 못 박혀 죽고 이후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피조물의 정체성은 ‘예수님과 함께’라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사람'이라는 단어를 성경적으로 깊게 파헤져 보면 그 의미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을 때에만 ‘사람’이 됩니다. 남자는 예수님, 여자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은 전부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이 흰돌에 적혀 있는 새 이름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홍길동(각자의 이름을 넣어보세요.)’이 됩니다. 즉, 새로운 피조물의 정체성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나’라는 매우 독특한 구조의 완성된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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