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는 성령입니다. 모든 복음은 오직 성령님만 교회(나)에게 전달하고 가르칠 수 있는 것이므로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를 통해 교회에게 편지하라는 표현을 쓰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하여 먼저 나오죠. 예수님께서는 모든 역사에 하나님의 아들로 존재하시면서 불꽃 같은 심판자의 눈으로 선택받은 자들과 유기된 자들을 철저하게 구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 같은 예수님의 행보(발)는 끝까지 찬란하고 굳건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것을 ‘빛난 주석 같은 발’ 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19절은 얼핏 보면 칭찬 같이 보이죠? 하지만 우리는 절대 칭찬받을 수 있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기준이 너무나 높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죄인이자 죽은 자인 우리는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하라고 했는지 기억나세요? 눈이 범죄하면 뽑아버리고 손이 범죄하면 찍어버리라고 하셨죠.
이런 율법의 본질적 기준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요. 형제를 미워해도 살인한 것이라고 다시 풀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기준에 부합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없습니다. 더불어 우리는 어떠한 선한 마음을 품을 수도 없고 선한 행위도 할 수가 없다고 로마서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의 정체성(죄인이자 죽은 자)을 늘 잊기 때문에 오늘 말씀 19절도 우리의 행위를 칭찬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 19절은 우리의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 즉 성령님의 열심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종교 생활을 하다보면 교회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인내의 행위가 처음보다 점점 더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인데 이것은 모두 성령님의 섭리에 의해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러데 이것은 ‘칭찬’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께서 알고 있다’는 펙트 체크일 뿐입니다. 이 부분이 너무 어렵죠?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꼭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10명 뿐인 교회에 어떤 목사가 부임했는데, 그 목사는 복음을 전달하기 보다는 교회사업부흥만을 외치는 사람이라고 해보죠. 그런데 그 교회 사업이 그 지역의 이익과 부합하여 만명이 넘는 교회로 사람이 많아졌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게 ‘네가 처음보다 교회사업 행위가 많아 져서 교회에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을 내가 잘 안다.’라는 펙트 체트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19절 하반절 '네 나중 행위가~~' 의 '행위'라는 단어를 굳이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복음은 계속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죠. 그런데 특정 구절에 굳이 '행위'라는 단어를 쏙 집어 넣으셨다면 그 이유를 아시겠죠? 이 뉘앙스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행위에 묶여 있는 유기된 종교인들은 이런 구절에 열광하여 더욱 행위를 쌓게 됩니다. 특히 성실 하신 분들은 더 더욱 그러하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치타'로 태어난 동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치타야 네가 점점 자랄 수록 더 잘 달린다는 것을 내가 잘 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랑이라는 행위, 봉사라는 행위 등등을 버려라~~ 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렇게 받아드리면 '치타야~~ 달리지 말거라' 라고 알아듣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사람이 많아지는 것도, 치타가 자랄 수록 더 잘 달리게 되는 것도 모두 큰 그림으로 보면 하나님의 섭리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욥에게 고난을 준 사탄을 생각해보세요. 사탄 조차도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본질적 뉘앙스를 이해하지 못하면 요한 계시록 내내 하나님의 의도를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20절을 보면, 이렇게 교회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인내 '행위'의 끝판왕인 교회에 이세벨이라는 이단이 활개를 치며 성도를 꾀고 성도들이 행음하고 성도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모순된 장면이 같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바로 '나'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음행'은 예수님을 버리고 다른 가치를 쫓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에서 예수님을 쫓는 것이 아니라 종교행위를 쫓아 자기 의를 쌓고, 인간 관계를 쌓고, 존경과 박수와 위로를 쌓는 모든 것을 영적 음행이라고 하죠. 그런데 선택받은 자들이라도 이런 모습으로 종교활동을 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택받은 자들만이 가지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이렇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소망할 수 밖에 없구나~~ 의 방향성을 꾸준히 가지게 된다는 것이죠.
요한 계시록에 나온 일곱 교회는 ‘나’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내가 종교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모든 상황을 일곱 교회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설명하시는 중이니다. 여기서 촛점은 이런 모든 상황 속에서도 나의 구원을 완성시켜 나가는 하나님의 열심에 대하여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더 반복합니다. 이것은 칭찬, 이것은 책망 이므로 이런 행위는 하지말고 이런 행위는 더 쌓자~~ 가 아니라 내가 이런 모든 것을 겪게 되는구나~~ 그럼에도 성령께서 나의 구원을 이루어나가시는구나~~ 라는 하나님의 열심이 초점입니다. 나를 보지 마시고, 나를 부인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를 보세요. 하나님의 열심이 어떠한지~~ 그 분이 오죽했으면 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 내려와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 이런 하나님의 열심을 어떻게 설명할꼬~~
그냥 나는 예수님이 아니였으면 먼지일 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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