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 반복 서론 : 일곱 교회는 일곱 개의 각기 다른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7이라는 숫자는 복음에서 ‘완전함’을 의미하므로 ‘완전하게 구원받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즉, 일곱 교회는 ‘구원받은 나’입니다. 고로 각각의 교회마다 칭찬과 책망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땅에 있는 동안 겪게 되는 모든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열심이 나를 구원하신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이 방향성을 잃지 마시고 묵상하세요. ))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교회에게 직접 편지하지 않고 항상 그 교회의 사자를 거치는 이유는 사자는 성령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라는 뜻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너에게 말씀하신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하여 가장 먼저 포문을 열죠.
‘아멘’ 이라는 뜻은 ‘진리, 진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와 말씀을 끝맺음할 때 하는 ‘아멘’이라는 것은 ‘그 말씀은 진리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실 ‘아멘’이라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써야 할 단어죠.
성경 말씀을 보면, ‘진실로 질실로 내가 말하노니’라는 구절이 종종 눈에 띄죠. 이때 나온 ‘진실로 진실로’라는 단어가 바로 ‘아멘 아멘’입니다. 성경에서 두 번을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매우 강력한 강조법인데, 그 내용 자체도 ‘진실로, 진실로’ 이기 때문에 얼마나 강력하게 강조하시려는지 아시겠죠? 그래서 특별히 이 구절이 나올 때는 평소보다 더 깊히 묵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그 자체가 ‘아멘이시다’라고 나옵니다. 즉, 예수님 그 분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진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거짓 없이 사셨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평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진리의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정체성은 바로 ‘복음’이죠. 예수님은 그 복음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온전하게 그 복음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그래서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은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창조의 근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나옵니다. 즉, 모든 창조는 예수님이 한 것이며 그 창조의 목적도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과 질서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창조된 것입니다. 지금 눈을 들어 모든 주변 사물을 보시고 그 사물이 움직이는 질서를 보세요.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1%도 보지 못하죠.
태양(빛)이 예수님을 상징하고 지구(흙)는 인간을 상징하기 때문에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질서를 만드셨죠. 또한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빛(밝음)과 생명을 얻게 되는 질서를 만드셨죠. 하지만 인간은 불과 몇 백년 전까지만 해도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심지어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지목해서 죽였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우주를 탐사할 수 있는 과학 일부 허락했죠. 그랬더니 인간은 그 과학으로 하나님 없음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고 외계인 탐사를 시작했죠. 이것이 바로 죄된 인간의 본성입니다. 끝임없이 선악과를 따먹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우리가 기도의 끝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되어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기도하실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아는 사람만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그 밖의 사람이 하는 기도는 절에서 자기의 바램을 비는 행위와 똑같습니다. 부처라는 우상의 자리에 예수님을 가져다가 놓는 것 뿐입니다. 이것을 경고하는 십계명이 제 3 계명입니다. 자신 혹은 인간 공동체의 욕심을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행위를 '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로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게 되면 그 동안 했던 기도가 점점 없어집니다. 그렇다는 것은 나의 기도가 나의 욕심 혹은 공동체의 욕심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기도는 겉 모습만 다를 뿐 '주기도문'의 속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게 됩니다. 신기하죠?
한나의 기도를 생각하십시오. 한나는 자식이 없어서 수모를 당했고 그것이 억울해서 기도를 시작했죠. 그러나 이후 한나는 ‘하나님과 심정이 통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말씀(예수 그리스도)을 전할 사람이 없어서 슬퍼하고 있다는 상황이 자신의 상황과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과 심정이 통했다'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후 낳게 된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게 됩니다. 그 자식이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다닌 사무엘이 됩니다.
끝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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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참 복음을 단 한 사람이라도 같이 고민하고 대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 한 분이라도 그런 분이 곁에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런 분께 이 묵상을 전해주시고 함께 고민하세요.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들만 그 분의 음성(복음)을 듣게 됩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삶에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버립니다.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묵상을 함께 나누십시오.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함께 할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