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완료)

계3:7-8(24.07.23.화)

은혜바라기 2024. 7. 23. 08:40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 반복 서론 : 일곱 교회는 일곱 개의 각기 다른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7이라는 숫자는 복음에서 ‘완전함’을 의미하므로 ‘완전하게 구원받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즉, 일곱 교회는 ‘구원받은 나’입니다. 고로 각각의 교회마다 칭찬과 책망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땅에 있는 동안 겪게 되는 모든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열심히 나를 구원하신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이 방향성을 잃지 마시고 묵상하세요. ))

 오늘도 예수님의 정체성이 먼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하시고 진실하시다고 합니다. 거룩이라는 뜻은 ‘분리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인본주의와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벧전 1: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그래~~ 나도 하나님 같이 거룩한 행위나 성스러운 자세를 유지해야 겠다~~’로 생각하지면 안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인본주의와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으므로 너희도 인본주의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성스롭고 거룩한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그 어떤 모습을 상상하던 그것은 인간의 기준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습에 갇혀 있을 것 같습니까?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계셨는데, 그 때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을 유지하셨을까요? 이런 생각 자체가 모순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본주의 종교'가 만들어지죠. 

 

 조금 시각을 바꾸어서 '선'을 생각해보죠. 하나님은 선을 행하신다~~ 혹은 하나님은 선만을 행하시고 생각하신다~~ 이 말은 일면 맞는 말 같지만 틀렸습니다. 정확하게 맞는 말은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행하시는 모든 것이 '선'이다.' 입니다. 이 차이가 이해가 되셔야만 성경과 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7절 후반절을 보면, 예수님을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고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22장 20절 엘리아김 에피소드를 인용한 것입니다. 내용을 요약해보죠. 

 국고 맡은 궁정대신 셉나가 타락하자 셉나를 심판하고 그 자리에 엘리아김을 앉히고 나라의 모든 국고(재산) 열쇠를 엘리아김에게 주면서 그가 문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을 만큼의 권한을 준다는 내용입니다. 왜 이 에피소드를 가지고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는데 썼을까요? 원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떠났죠. 그래서 인간이 만든 기준, 즉 인본주의에 묶여 살게 됩니다.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 타락해서 쫓겨난 셉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셉나를 심판하고 그 자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맡겼죠. 이것이 예수님의 여러 정체성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두번째 아담이라고도 합니다. 

 8절을 보면,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이상 절대 구원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후 빌라델피아 교회를 매우 칭찬하는 듯한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고 하죠. 여러분은 정말 그런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뽑고 또 뽑아서 만든 12명의 제자. 그 중 가장 열성적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수 제자 베드로를 생각해보세요.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3번을 부인하죠. 심지어 마지막에는 저주까지 합니다. 이게 나의 본모습입니다. 

 처음 나온 [ 반복 서론 ]을 다시 읽어 보세요. 요한 계시록에 나온 칭찬같은 구절은 나의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는 늘 거짓말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단 한 번도 지키지 못하고 배반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이런 구절이 먼저 나왔죠. “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다” 이 말씀에서 능히 닫을 사람은 ‘나’도 포함이 됩니다. 즉, 나의 모자란 행위, 베드로의 배신으로도 절대 이 문을 닫을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나 마나한 이야기 아닌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반듯이 지켜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뭘까? 바로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나로 오셔서 나 대신 그 분이 지켜내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늘의 모든 지위를 버리시고 죄인의 몸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키시고 순종하셨죠. 그리고 내가 받을 죄인의 댓가를 십자가에서 치루셨습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칭찬 같았던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열심에 대한 칭찬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를 품에 안고 그 분이 받아야 할 칭찬을 나에게 전가해 주신 것이죠.

 

 종교는 '내가 겸손해야지~~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지~~ '를 생각하며 노력하죠. 이것은 사실 '처세술'입니다. 이 저변에는 그런 겸손한 사람으로 인정받아서 인간관계 유지용으로 사용하려는 것이 깔려있죠.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면 알 수록 나의 엉터리 가치가 점점 더 무너지기 때문에 그냥 예수님만 소망하는 방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3:10(24.07.25.목)  (3) 2024.07.25
계3:9(24.07.24.수)  (7) 2024.07.24
계3:4-6(24.07.22.월)  (1) 2024.07.22
계3:1-3(24.07.19.금)  (1) 2024.07.19
계2:21-29(24.07.18.목)  (1) 2024.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