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불을 다스리는 천사’도 예수님입니다. 이후 예리한 낫 가진 자도 예수님입니다. 이후 실제 낫을 땅에 휘두르는 천사도 예수님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을 표현을 할까요?
성경은 계속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우상’처럼 생각하고 나의 꿈을 이루어주는 도구로 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종교'라고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 벗어나 죄인이 된 이후에 인간에게는 계속 죄인의 증상이 나타납니다. 그 중 가장 강력한 것이 ‘종교’입니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게 끊임없이 종교를 생산합니다. 그 이유는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 연합되어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하게 지음받았는데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미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스스로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면에 존재하는 텅빈 하나님의 자리에 각종 우상을 넣는 것입니다. 돈으로, 인기와 명예와 권력으로, 종교로 그 자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이 텅 빈 내면은 절대 고독감으로 표출됩니다. 인간은 이 텅 빈 자리에 친구, 가족, 인기, 명예, 지식, 사치, 종교 등으로 채워 넣죠. 하지만 그 어떤 것을 넣어도 절대 고독감은 치유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 중 ‘인기’로 텅 빈 마음을 채운다고 해도 그것은 ‘풍선’과 같습니다. 그 풍선이 터지면 전보다 더 심한 우울감, 고독감, 공항장애를 앓게 됩니다. 그 자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채울 수가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자리에 자기 상상력으로 예수님이라는 우상도 만들어 냅니다. 내가 만들고 상상하는 예수님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종교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종교가 복음을 설명하기에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종교를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은 불순물을 태워 정화시키는 불을 다스리는 분으로, 심판을 주관하는 낫을 가진 분으로 나오시는 것입니다. 물론 천사와 예수님은 별개의 존재이지만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천사의 속성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성을 그렇게 인식하셔도 됩니다.
이후 19절을 보면,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진다고 합니다. 늘 말씀드렸다시피 성경은 오직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 쓰여 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기된 자들을 협박하고 두렵게 하여 그들을 돌이켜 구원받게 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만약 이런 방법이 가능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셨겠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벌을 주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석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생각하면서 해석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본주의 종교라고 하죠.
고로 이 19절의 포도송이는 명백하게 ‘선택받은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선택받은 자들도 이 땅에서는 옛 자아로 살기 때문에 유기된 자들과 100% 똑같이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단지 성령께서 오셔서 복음을 들려주시면 그것을 알아듣게 되는 증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자들도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져집니다. 이 큰 포도주 틀은 광야, 즉 고난의 인생을 의미합니다. 가나안이라는 큰 성 안으로 들어오기 전의 모든 삶(광야)을 가리키죠. 더 쉽게 풀면 ‘우리의 옛 자아의 삶’입니다.
이렇게 옛 자아로 사는 고난의 인생(광야) 기간 동안 흘리는 피가 1600 스다디온에 퍼지게 된다고 하죠. 6의 숫자는 인본주의 숫자입니다. 1000은 완전수죠. 인본주의에 완전히 묶여 있는 옛 자아의 모든 피가 다 흘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고난을 의미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1세대 60만명 모두 죽었죠. 그 이후 2세대만 여호수아(예수의 히브리어 표기)와 함께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심지어 1세대는 모세조차 죽습니다. 오직 예수님(여호수아)과 그 예수님이 품에 넣은 자(갈렙)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무엇을 잘못했죠?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한테 반석에게 명해서 물을 내라고 했는데 모세는 반석을 두 번이나 쳤으니 불순종하였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다~~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의 해석이 분분하지만 이 에피소드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모세에게 어거지 쓰신 것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율법(말씀)을 받고, 가르치고, 지도하였고 표면적으로는 율법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결승점인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반석을 두 번 쳤다고 팽 당하는 모세~~ 이상하죠?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이상하게 그려져야 ‘모세가 특정 행위 때문에 가나안에 못 들어간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복음의 큰 의미를 되새길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미는 우리가 최후까지도 지켜내야 하는 율법조차 결국 가나안(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버려져야한다는 것, 오직 가나안(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율법이 버려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지향성은 버려지고 본질은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는 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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