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오늘 묵상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잘 따라 오세요.
13절을 표면적으로 해석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다가 생을 마감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살아생전 수고한 모든 행위들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라고 하죠.
이 해석을 바탕으로 13절을 조금 더 자세히 해석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다가 죽게 되면 그 공로와 업적이 죽은 후에도 따라온다는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맞을까요? 오늘 본문은 정말로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어렵습니다. 잘 따라오세요.
예수님의 마지막 대인사역인 십자가 우편 강도 에피소드를 보면, 그는 예수님을 위해 그 어떠한 희생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선언된 인물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를 보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시작하면서, 각각의 사람들이 3시,6시,9시,11시에 포도원에 와서 일을 합니다. (현대 시간으로는 오전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 하지만 그들의 노력과 행위에 상관없이 품삯은 약속한 대로 모두 한 데나리온씩 받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불공평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공평한 것입니다. 인간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이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때 일찍 온 자들이 자신의 수고와 공로를 계산하여 더 달라고 하지만 주인은 화를 내면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는 나중이 된다.’고 선언합니다. 11시(오후5시) 해질녁에 와서 일도 거의 못하고 끝나버린 자들이 바로 예수님 십자가의 우편 강도입니다.
어떠세요? 오늘 본문과 완전히 대치되죠? 그래서 오늘 본문 해석은 인간의 기준으로 해석을 하면 모순에 빠져버립니다.
13절을 복음의 눈으로 해석을 하면 마지막에 나오는 ‘그들의 행한 일’이란 ‘예수님을 믿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 반대급부로 이 세상 인본주의 가치가 붕괴되죠. 이것은 가치적으로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요한복음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갈라디아서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유명한 두 구절을 13절에 대입해서 설명하면, 성령께서 선택받은 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복음을 보게 하면 그들은 이 세상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소망하게 되는데 이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이제 인본주의 가치 위한 수고를 더 이상 하지 않고 쉬게 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수고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그 ‘믿음’ 에 따라 천국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즉, 13절에 나온 그들의 행위는 '예수님만을 소망하는 것' 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만 하신 참 행위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우리는 그 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분의 품 속에 들어가 그 분이 받는 복을 공짜로 함께 받게 되는 것이죠.
어떠세요? 처음 해석과 완전히 다르죠? 나를 기준하면 말씀은 나의 행위를 기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하면 전혀 다르게 오직 복음으로만 해석이 됩니다. 이 두 간극이 쉬워 보여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요단강을 건너고 홍해바다를 건너는 것이죠. 이것을 참 세례인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오늘 묵상은 매우 어렵습니다. 온전한 복음의 눈을 뜨지 않으면 ‘행위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나는 소명을 받았다~~’ 라고 외치면서 평생 종교적 헌신을 하고 심지어 순교(?)하는 사람들도 있죠. 이런 인간적인 수고와 노력, 순교는 복음적 가치로 ‘0’ 이라는 것이 이해가 될 때 예수님의 가치가 ‘100’이 됩니다.
이 묵상을 보면서 노력, 봉사, 헌신 할 필요가 없구나~~ 노력하지 말자~~ 의 방향성에 서 계신다면 그것도 '행위를 할까? 말까? ' 의 기준에서 '하지말자'로 판단한 것이므로 그것도 행위를 기준해서 판단하는 것 뿐입니다.
정말 조심스러운 예를 들면, 민주당이 옳은가? 국힘당이 옳은가? 민주주의가 옳은가? 사회주의가 옳은가? 자본주의가 옳은가? 공산주의가 옳은가? 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통치는 모두 무용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오직 우리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향성에 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정치 제도 조차 하나님의 도구이므로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가 그 현상 속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죠. 즉, 산 속으로 들어가 통치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권력(자)에 따르라고 나옵니다. 하지만 복음을 알게 된 자들과 유기된 자들은 이 구절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게 되죠.
예수님의 오른쪽 강도는 그 짧은 순간 성령께서 그 자의 눈을 뜨게 하여 복음(진리)을 알게 한 것입니다. 지금의 행위 중심적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강도는 십자가 형벌 중간에 사면이 되어 평생 착한 일, 봉사, 선교를 하면서 성화를 이루는 삶을 살다가 죽어야 하죠.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마지막 대인사역인 십자가 강도 에피소드로 우리에게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끝
P.S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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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참 복음을 단 한 사람이라도 같이 고민하고 대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 한 분이라도 그런 분이 곁에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런 분께 이 묵상을 전해주시고 함께 고민하세요.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들만 그 분의 음성(복음)을 듣게 됩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삶에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길을 잃어버린 양이기 때문입니다.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묵상을 함께 나누십시오.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함께 할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