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완료)

요한계시록15:1-4(24.11.06.수)

은혜바라기 2024. 11. 6. 08:38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일곱은 복음적 완전수입니다. 그래서 일곱 천사란 100% 완벽하게 하나님의 일을 순종적으로 완성하는 속성을 의미하므로 성령님으로 해석하셔도 됩니다. 구약에서 어린 양을 예수님으로 해석하듯 복음의 의미가 같기 때문입니다. 물론 천사는 피조물이고 성령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천사는 성령님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 100% 순종합니다. 그래서 천사의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결국 성령님의 의도와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복음적 의미가 같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고로 일곱 재앙도 완전한 재앙이라는 뜻입니다. 완전한 재앙이라는 것은 그만큼 혹독하다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을 인본주의에서 분리하여 완벽하게 구원에 이르도록 할 정도의 재앙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후 계시록 16장부터 시작되는 일곱 대접의 재앙을 가리킵니다. 

 ‘불이 섞인 유리 바다’에서 불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바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 속에 진행된 인류의 모든 역사를 의미하죠. 그래서 유리 바다란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의 깊은 곳 까지 투명하게 들여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로 종합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불과 같은 연단의 고난으로 이 세상 모든 역사의 깊은 곳 까지 심판하여 선택받은 자들을 인본주의 세상에서 분리하여 구원을 이루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문장이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 이 나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자들은 선택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이긴 자들이 유리 바다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로 노래하죠. 이것은 흡사 구약에서 모세와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를 건너고 그들을 죽이려고 따라오던 애굽인들이 그 홍해바다에 수장된 뒤 그 홍해바다 주변에서 하나님께 찬양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래서 3절,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라고 나옵니다. 홍해 바다를 건너는 것이 우리가 받는 '세례'의 원형입니다. 이것은 애굽이 상징하는 인본주의와 분리하는 것이죠. 조금 더 세밀하게 보면,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나의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분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애초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문설주(십자가)에 바른 어린양의 피 안에 숨어 애굽과 나누어져 구원을 얻은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가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찬양합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크고 놀라움을 찬양하고 예수님의 왕 되심을 찬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길만이 의롭고 참되다는 것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찬양해야 한다~~ 는 것은 의무가 아닙니다.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이렇게 예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는 증상이 나온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때 찬양은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예수님을 향한 감탄을 의미합니다. 

 4절 중반에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라는 중요한 문장이 나옵니다. 거룩이라는 의미는 ‘분리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무엇과 분리되었을까요?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 즉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은 ‘거룩함’ 그 자체였습니다. 즉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은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되고 인본주의(죄의 정체)라는 죄와 결합되면서 이 세상은 모두 부정한 상태가 되었고 인간은 전적타락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로 인하여 이 땅에서 분리, 즉 들어 올려지면서 그 분의 품 안에 있는 모든 선택받은 자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분리, 즉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인들은 스스로 거룩하다. 혹은 거룩해질 수 있다. 혹은 거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등등으로 거룩의 의미를 훼손시키고 있죠. 

 그래서 오늘 4절 중반에 나온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라는 문장을 늘 가슴에 담고 있어야 합니다. 노아가 이 땅과 분리되어 물(은혜)로 들어 올려져서 구원받은 것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십자가로 들어 올려져서 거룩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선택에 의해 그 분의 방주(십자가)에 올라 탈 때 만이 함께 거룩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이 방주에 탈 수 있었던 조건은 '행위'가 아니라 ‘노아의 가족’이라는 신분 때문입니다. 

 구원은 나의 행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애당초 구원은 태초에 예수님의 가족으로 지음받은 예수님의 가족들에게만 국한된 것입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이 땅에 살면서 성령님께 그 소식을 듣게 되죠. 그로 말미암아 그들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소망하는 믿음의 증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 그 증상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히브리서11:1-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