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
천사가 이르되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직전 묵상까지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에 대한 묵상을 마쳤습니다. 여기 나온 일곱은 일곱의 개수 혹은 일곱 번째의 순서가 아닙니다. 숫자 ‘7’은 복음적 완전수이기 때문에 그 숫자에 들어 있는 ‘완전성’ 이라는 속성을 가져다 쓴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순서에 따라 기록한 이유는 우리가 복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의 모든 사건은 순서와 상관없이 선택받은 자들의 인생 내내 다가옵니다.
16장 까지는 우리가 알기 쉽게 시간적 순서처럼 배열하여 복음을 설명하였다면 오늘 묵상부터는 종합적인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더 쉽게 설명 드리면 16장까지는 나무를 하나씩 세면서 숲을 이해시켰다면 17장부터는 전체 숲을 관조하고 비교하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물 위에 앉은 큰 음녀’는 사탄이기도 하고 그 사탄의 세상인 인본주의이기도 합니다. ‘물’이란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이 세상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이 세상의 역사에 인본주의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는 형태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큰 음녀가 땅의 임금과 음행하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했다고 나오죠. 큰 음녀가 ‘인본주의’를 의미하기 때문에 계속 ‘땅’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임금이란 우리의 옛 자아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오직 나의 기준대로 살기 때문에 그 속성이 ‘왕’과 같죠. 고로 이 구절은 사탄의 세상인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나의 옛 자아의 비참한 상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3절 성령께서 요한을 광야로 데리고 가죠. 광야는 선택받은 자들의 고난의 인생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탄 모습이 나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나의 옛 자아가 인본주의 등에 업혀 세상을 살아가는 장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옛 자아가 인본주의 등에 업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성령께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보세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가득하다고 나오죠.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기준하여 살기 원하지 않은 인간이 자신과 인류의 기준대로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핵심입니다.
또한 이렇게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나의 옛 자아는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다고 하죠. 계속 말씀드렸지만 이런 숫자를 ‘갯수’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그러면 일곱 머리 나누기 10개의 뿔이면 머리 한 개당 1.4개인가? 아니면 머리 6개와 나머지 머리 1개에 4개가 몰려있나? 이런 엉뚱한 고민만 하게 됩니다.
또한 이것을 역사적인 어떤 사건으로 예언하거나 해석하는 것도 안 됩니다. 여기서 이단이 발생하죠. 물론 온 우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방향성을 가지기 때문에 역사는 성경 말씀대로 표현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 말씀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상기시키는 역할일 뿐입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나를 포함해서 역사 속에서 존재하였던 모든 선택받은 자들의 인생 내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7’이라는 숫자의 속성과 ‘10’이라는 숫자의 속성을 가져다 쓴 것이 목적일 뿐입니다. 둘 다 완전수죠.
이후 9절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 또는 일곱 왕이라고 하죠. 또한 12절에는 10뿔은 10왕이라고도 나옵니다. 복잡하죠? 그런데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그냥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나의 옛 자아의 속성을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나의 옛 자아는 늘 바벨탑 꼭대기 처럼 완벽한 1등을 원하고 늘 자기 기준에 사는 왕 처럼 살기를 원하며 그 죄의 고집은 하나님과 동등할 정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지만 하나님이 야곱에게 지는 것도 이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 보면, 여자를 바벨론이라고 하고 땅의 음녀와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도 하죠.
또한 4절을 보면, 그 여자는 늘 인본주의 가치만을 소유하려는 모습으로 나오죠. 자주 빛과 불은 빛 옷은 권력과 매력, 인기 등을 의미하고 금, 보석, 진주는 재물 등을 의미하는데 4절 후반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가치를 두지 않고 이런 인본주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음행’이라고 단정하고 있죠. 진정한 남편인 예수님을 떠나 인본주의와 사랑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했다고 나옵니다. 이 부분은 해석이 어렵습니다. 여자는 선택받은 자들의 옛 자아가 맞습니다. 그런데 성도를 박해하는 자로도 나옵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선택받은 자들이 예수님을 계속 죽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복음은 알게 되어 예수님을 믿게 된 후에도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는 옛 자아의 삶을 살면서 계속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 하반절에 이런 힌트가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 라고 나오죠. 반전의 반전이 있기 때문에 계속 크게 놀라는 요한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마지막 사도로 등장한 바울의 삶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릅니다. 바울은 그 이름이 사울이었던 시절에 성도들과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했던 사람이죠.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죽이러 다녔죠. 하지만 사울(바울)은 그때도 이미 구원받은 자였습니다. 구원은 이미 태초에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울은 이후 바울로 정체성이 바뀌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됩니다. 선택받은 한 사람의 삶이 성령께서 관여하여 눈을 뜨게 할 때와 그렇지 못할 때가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보이시죠? 하지만 오히려 이것을 통해 나는 정말로 예수님만 필요하구나~~~ 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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