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오늘은 둘째 사망을 받는 자들에 대한 나열입니다. 특히 둘째 사망이라고 특정함으로써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늘 말씀드렸다시피, 성경은 유기된 자들에게는 단 1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불과 유황으로 심판받는 자는 나의 옛 자아를 의미하는 것이 더 큰 초점입니다.
나의 옛 자아는 늘 두려워합니다. 두려움과 욕심은 동전의 앞, 뒤면과 같습니다. 집단 심리학의 대표적인 표출 형태가 ‘주식 그래프’입니다. 주식을 보면 파동을 치면서 위, 아래로 왔다 갔다 하죠. 하지만 그 모든 파동은 전부 집단적 욕심과 두려움의 곡선일 뿐입니다.
사람은 욕심으로 출발해서 두려움으로 끝을 맺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욕심으로 선악과를 따 먹고 두려움이 생겨 하나님으로부터 숨죠.
“야고보서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은 욕심으로 출발해서 죄를 낳게 되면서 두려움에 떨다가 사망으로 끝납니다. 여기서 ‘죄’란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항상 기억하세요.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 분리됨’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살인, 간음, 절도, 거짓말 등등의 ‘죄의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죠. 죄와 죄의 증상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옛 자아는 항상 욕심을 품고 그로 인해서 두려움에 떠는 존재입니다. 10등은 1등을 하려는 욕심과 20등으로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라는 두려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로 인한 두려움도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설명하시기 위해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계속 욕심을 가지고 최고의 지위를 탐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고 그렇게 얻은 최고의 지위에서 떨어질까 두려워 항상 최악의 선택을 하는 모습들을 자주 보여주시죠.
두 번째 나의 옛 자아의 정체성은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선택받은 자들에게 오셔서 복음을 알려주시면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소망하면서 믿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옛 자아는 늘 그 믿음을 버리고 다시 인본주의 가치를 따르고 인본주의 인과율과 논리로 무장하게 되죠.
세 번째 나의 옛 자아의 정체성은 ‘흉악한 자’입니다. 오직 악에 물들어 단 1의 선도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모두 악한데 스스로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죠. 이것이 나의 옛 자아의 가장 흉악한 점입니다.
“로마서3:10-12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네 번째 나의 옛 자아의 정체성은 ‘살인자’입니다.
“요한1서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태어나면서 단 한 사람도 미워하지 않은 적이 없나요? 우리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인간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기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것을 나를 기준하여 판단합니다. 나에게 이로운 것은 선, 나에게 해로운 것은 악으로 판단하죠. 이것을 인류 전체로 확대하면, 인본주의에 이로운 것은 선, 해로운 것은 악이라고 규정하고 인간 세상에서는 이것을 ‘불변의 정의’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인본주의는 이해득실 보다는 개인적 이해득실이 더 본질이기 때문에 사람이 많아지고 자원은 한정되는 순간 경쟁과 싸움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합리적인 배분을 한다고 해도 마음 상태는 그냥 참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마음 상태조차 살인이라고 규정합니다. 고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런데 이것을 온전히 지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은 자신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자들을 보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분이시죠.
또한 ‘살인’의 더 본질적 의미는 우리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것, 즉 십자가에 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섯 번째 나의 옛 자아의 정체성은 음행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참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천국에서는 현실 속의 부부와 가족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교회와 예수님의 관계만 존재하죠.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버리고 인본주의 가치를 따르는 순간 예수님께 음행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나의 옛 자아의 정체성은 점을 보고 우상 숭배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 인본주의 가치를 따르는 모든 순간을 의미합니다. 특히 인본주의 종교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죠. 우리가 다니는 모든 지역교회는 전부 인본주의 종교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여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죠. 고로 선택받은 자들은 지역교회를 다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교회가 아닌 예수님의 품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찌 보면 지역교회는 마지막 심판의 과정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의 옛 자아의 정체성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인에게 하는 거짓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부분은 지면상 너무 길어져서 생략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부분만 별로도 묵상할께요)
오늘 본문은 전부 다 나의 옛 자아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런 나의 옛 자아를 불과 유황으로 죽여버리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감당하셨죠. 그리고 불은 불순물이 섞인 금을 제련하여 순금으로 만드는 정제의 의미가 있고 유황은 장례에 사용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의 옛 자아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못 박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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