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진행중)

마가복음1:21-22(24.12.30.월)

은혜바라기 2024. 12. 30. 08:37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1절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죠. 이것은 복음의 가장 중요한 원리인 ‘한몸원리’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계속 함께 다니시는 이유는 본문의 제자들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택받은 자들에게 ' 내가 너희와 늘 함께 다닌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친다고 나옵니다. 안식일과 회당에 대한 묵상을 해 보죠. 

 안식일의 정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도구는 매우 많습니다. 구약 전체 아니 이 세상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빛, 어린 양, 십자가, 물, 불, 안식일과 같이 특별히 더 뚜렷하게 예수님의 정체성이 강조된 도구들이 있습니다. 

 안식일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날짜라는 도구로 설명한 것입니다. 안식일을 잘 지켜야 천국에 간다는 말씀은 100% 정답입니다. 하지만 그 안식일의 정체가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예수님의 품 안에 들어가 그 자리를 잘 지켜야 천국에 간다는 것이죠. 좀 저 자세히 설명하면 우리가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자리에 계속 있도록 지키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코미디로 바꾸어 놓았죠. 말씀의 본질을 모르니 말씀의 본질은 버리고 그 형태만 발전시킨 기형적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의미의 본질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다 이루시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에 관한한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아무 공로와 업적도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벼를 손으로 비벼 먹으면 ‘타작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율법을 어겼다고 비판합니다. 코미디죠.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현대 교회가 일요일을 성스러운 날로 바꿔가면서 안식일의 맥락을 이어간다는 것입니다. 일요일을 주일이라는 단어로 바꾼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심지어 그 날을 성스러운 날로 정하여 성스럽게 지키라고 외칩니다. 이것을 점입가경이라고 하죠. 성스럽다는 단어는 오직 예수님께만 사용이 가능합니다. 

 일요일에 교회 하루 안 가는 것은 학교나 직장을 하루 빠지는 것과 가치적으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역 교회는 단 1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의 십계명 중 안식일에 관한 내용을 보면 6일 동안 열심히 일하라. 그러나 7일째 되는 날은 쉬라고 합니다. 6일 동안 열심히 일하라는 것은 성실, 근면, 충성 같은 ‘행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6은 인본주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선택받은 자들은 이 땅에 살면서 인본주의 삶에 묶여 포로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다가 안식일,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쉬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부분이 조금 어렵습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예레미야는 ‘포로로 끌려가야 한다.’ 라고 주장했고 나머지 악한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우리 땅을 지킬 수 있다’고 했죠. 우리의 생각으로는 악한 선지자들의 말이 그럴듯하죠?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예레미야와 같았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의 율법과 그 뜻이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죄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인본주의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안식일이 되면 그때서야 쉬게 되죠.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안식일에는 본인, 자녀, 종들, 짐승, 이방 나그네 까지 모두 쉬어야 한다고  나오는데 이것은 구원은 이 세상의 신분과 지위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정체성 중 하나는 ‘장막, 회막, 성막, 회당’입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품을 의미하죠.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선택받은 자들을 품에 안고 가르치신다는 의미입니다. 

 22절을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교회 지도자들과 같지 않다고 하죠. 우리는 각자 자신의 지역 교회에 나가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통해 교훈을 듣고 종교 생활을 하게 되죠. 이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신 분은 그 나마 복음의 본질을 잘 아시는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되지만 그럴 확률은 정말 희박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 확률이 희박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참 복음은 사람을 모이게 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참 복음은 원래 그 것을 말하는 자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참 복음을 말하는 스덴반에게 돌을 던진 것 처럼, 참 복음을 말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 처럼 말이죠. 이것이 나쁘다~~ 라고 평가할 것이 아니라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복음의 대척점에 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구원의 방법이 없는 것이죠.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다는 것은 그 분을 죽여서 갈기 갈기 찢어서 제물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복음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아는 것이 선행되기 때문에 원래 목사가 참 복음을 전하면 그 목사에게 돌을 던질 정도로 아파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위로를 받고 오죠? 그것을 '누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인은 ‘누룩 섞인 인본주의 종교인’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오셔서 선택받은 자들의 눈을 뜨게 하면 어느 날 ‘종교와 교훈을 가르치는 목사’와 상관없이 그 목사가 읽고 있는 본문에서 참 복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성령께서 직접 가르치시는 복음은 그 동안 목사가 가르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죠. 이것을 오늘 본문 22절에서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다르다"

 “요한일서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여기서 기름이 성령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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