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구약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그 중 선지자들은 예수님을 가장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표지판들이죠. 그 중 최후의 표지판이 요한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표지판들과 상징들이 가리키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상징은 조용히 물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요한이 잡힌 후’ 라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실체가 등장하니 상징이 물러가야한다는 것이죠.
마태복음은 조금 더 자세하게 세례 요한의 죽음을 설명해 놓았죠. 요한은 헤롯왕의 그릇된 행실을 꾸짖다가 잡히고 결국 괴략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이런 요한의 죽음에 관하여 매우 많은 해석이 존재하지만 본질적인 해석은 ‘실체가 등장했으니 상징은 무대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죽음을 조금 더 복음으로 해석하면, 요한은 ‘행위와 율법의 충돌’로 죽게 된 것입니다. 즉, 구약의 모든 표지판의 대표 주자인 율법으로는 인간에게 답이 없다는 것을 요한의 죽음으로 답을 주고 떠난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답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라는 것이죠. 물론 요한이 그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의도하셔서 만드신 에피소드인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구약에도 나옵니다. 모세입니다. 이스라엘 1세대 60만명이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죠. 심지어 마지막에 ‘모세’도 죽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주자입니다. 모세의 죽음은 율법으로는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오직 여호수아만 들어가게 됩니다. 여호수아의 헬라식 이름이 예수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동조한 갈렙만 가나안에 들어가죠. 예수님과 동조된 사람, 즉 예수님과 한 몸 된 교회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은 이유는 지팡이를 한 번 치라고 했는데 여러번 쳤기 때문입니다. 너무 너무 이상하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상하게 만드신 에피소드입니다. 우리에게 지팡이의 횟수에 집중하지 말고 본질에 집중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구약의 표지판과 상징은 사라지고 그 실체인 예수님께서 드디어 갈릴리에 등장하셨습니다. 왜 갈릴리일까요? 이 갈릴리에 선택받은 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서 알아들어야 합니다. 갈릴리는 인간이 사는 모든 땅으로 생각하셔도 됩니다. 즉, 예수님은 그 분의 지체를 찾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지금 갈릴리라는 작은 무대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갈릴리에 살고 있는 제자들이 모든 선택받은 자들의 대표가 되는 것이죠.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 복음의 내용은 ‘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때가 찼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복음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디어 오셨다는 이미입니다.
그런데 그 조건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회개할 수도 없고 복음을 이해하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이 상태를 죄인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죽은 자에게 ‘일어나라’ 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에피소드가 나사로 에피소드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너라’ 명령하셨고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나던 나사로는 살아서 일어났습니다. 이때 나사로가 우리입니다. 질문드리죠. ‘나사로야 나오너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한 사람은 죽은 나사로일까요? 아닙니다. '성령'입니다.
고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는 조건의 수행자는 ‘성령’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엄밀하게 말하면 틀린 문장입니다. 이 문장을 복음에 맞게 고치면 ‘예수님으로 인하려 믿게 된다’입니다. 전자는 믿음의 출처를 ‘나’에게 두고 있습니다. 즉, 나의 마음에 믿음이라는 감정을 끌어 올려서 늘 믿는 감정을 유지하라는 명령으로 듣죠. 하지만 후자는 믿음의 출처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나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고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시면 우리는 복음에 눈을 뜨면서 그분이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믿음이라는 증상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 뿐입니다.
조금 더 쉬운 예를 들면, 장님에게 빨간 장미를 설명하면 빨간 장미를 볼 수 없는 장님은 그것을 덮어놓고 믿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이때 자신에게 더 잘해주었던 사람이 장미는 파랑색이라고 하면 그 믿음은 곧 흔들리죠. 하지만 장님이 눈을 떠서 빨간 장미의 정체를 확인하면 자연스럽게 굳건한 믿음이 증상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되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나에게 내린 명령이 아니므로 나의 의지, 행위,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나의 눈을 뜨게 하면 비로소 복음을 알게 되어 인본주의 가치를 소망하던 길에서 벗어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소망하는 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가치가 바뀌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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