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오늘 본문은 인본주의 방향과 복음의 방향이 얼마나 다른지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복음의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을 ‘귀신 들렸다’고 말할 정도로 두 방향성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천국과 지옥의 거리 만큼 계속 벌어지죠. 절대 이 둘은 섞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옛 자아는 절대 인본주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알게 되어 인본주의와 분리되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복음은 우리가 인본주의에서 절대 벗어날 수가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을 기초로 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너무 어렵죠?
십계명 중 제 4계명인 안식일에 대한 계명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6일 동안 열심히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성실하고 열심히 노동을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선택받은 자들도 숫자 6이 가리키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옛 자아로 살면서 인본주의 삶에 끝까지 묶여 살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인생을 열심히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제 7일에는 안식하라고 하셨죠. 이것은 일요일에 쉬라는 것, 즉 주일성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정체는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선택받은 사람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옛 자아로 인본주의에 계속 묶여 살게 되지만 성령의 견인으로 인하여 복음을 알게 되면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안식하며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는 늘 인본주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견인하여 때때로 그 인본주의 가치를 붕괴시키고 우리에게 복음의 가치를 알려주시면 우리는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는 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고 아직도 내 자식이 이 세상에 잘먹고 잘살기만을 바라고 아직도 교회에서 성실하게 종교생활을 하는 것만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고 묵상하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예수님께서는 매우 강력하게 복음의 속성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의 속성을 설명해 주시기 위해 그 분의 어머니와 형제, 자매를 모두 부인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이 읽혀지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실제로도 어머니를 부인하며 사신 불효자였을까요?
“눅2:51상 (어린시절)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어머니께)순종하여 받드시더라”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항상 어머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즉, 효자였죠. ‘효’는 인본주의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개념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율법도 ‘효’라는 개념을 지향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와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 사는 동안 ‘효’라는 개념에 항상 묶여서 살아가게 됩니다. 효를 잘하면 스스로도 자부심이 생기고 외부로부터 칭찬도 받죠. 하지만 효를 못하면 외부의 비난과 함께 스스로도 자괴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 자괴감을 방어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의 방어기제도 발동하죠.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알려주는 순간 우리는 절대부패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효를 잘하여 생긴 자부심도 결국 ‘자기 의’를 쌓는 바벨탑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효를 못하여 생기는 자괴감도 나의 무능력, 무가치함을 알게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인본주의가 추구하는 모든 것을 열심히 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 모든 것의 참 역할은 결국 내가 무가치하고 무능력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로인해 복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라는 단어는 복된 소식이란 의미입니다. 복음이 나에게 복된 소식이 되려면 반드시 내가 복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과 음식을 먹는 것이 나에게 복된 것이 되려면 나의 상태가 매우 목마르고 배고픈 상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형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땅에서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그들을 항상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사랑을 표면적으로 성공을 하는가? 실패를 하는가? 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기된 자들은 이것을 행위로만 풀게 됩니다. 부모님께 집을 사드리고, 밥을 사드리고, 한 달에 몇 번 찾아가는 행위을 지켜내면서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죠. 인본주의 삶에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게 되지만 역설적이게도 절대 복음을 알 수가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선택받은 자들은 그들을 절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효를 잘 하는 것은 자기 의를 드러내는 수단이며 효를 하지 못하는 경우는 나의 죄가 드러나는 수단이 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복된 소식만 기다려야 하는 비참한 상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은 매우 단순하고 쉽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여정은 그리 녹녹하지 않습니다. 이전의 인본주의 종교 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런 말을 했죠.
“빌립보서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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