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고향으로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복음을 가르치십니다. 안식일과 회당은 모두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택받은 자들을 품에 안고 그들을 쉬게 하고 복음을 가르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죠.
그런데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그 이유가 장황하게 나열되어 있는데 그 내용들의 공통점은 예수님을 인본주의 관점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연, 혈연, 학연의 눈으로 예수님의 능력, 지혜, 권위를 모두 무시하고 있죠.
그런데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결국 선택받은 자들의 인생을 미리 예고하는 것입니다. 즉, 선택받은 자들은 그들의 고향, 친척, 가족들을 사랑하므로 그들에게 참 진리인 복음을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인본주의 관점으로 그것을 평가하기 때문에 절대 설득되지 않고 오히려 배척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향에서는 ‘소수의 병자’만 치료하셨다고 나옵니다. 이 의미는 예수님을 어려서부터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오히려 구원받는 사람이 적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즉,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 예수님에 관하여 배우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복음을 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서 구원받는 자들은 매우 적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고 나오죠. 예수님께서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해서 ‘너무 이상한데~~’라고 어리둥절하신 것이 아니라 이 글을 읽은 우리에게 이런 이상한 상황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한 번 테스트를 해보세요. 제직회, 구역예배, 선교회, 남,여 전도회 등등의 모임에 참석하여 예수님에 관한 더 깊은 이야기를 해봅시다~~ 라고 거론하고 토론을 제안해 보세요. 아마도 ‘뭐야?’ 라는 이상한 눈으로 쳐다 볼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알고 있는 선택받은 자들이 이런 상황을 대면하면 '왜 교회에서 예수님에 관하여 깊게 이야기하는 것을 꺼릴까?~~ 참 이상하다~~'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암묵적으로 목사의 설교 외에 성도들 끼리 예수님에 관한 깊은 대화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단지 ‘우리 남편이 예수님 덕분에 승진했다~~’ 혹은 ‘ 우리 자식이 아프니까 예수님께 기도를 해주세요’ 정도입니다. 즉, 촛점이 ‘예수님’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 우리 가족 이야기, 우리 공동체(교회,회사,나라)이야기일 뿐입니다.
끝장 토론을 하듯 교회 안에서 예수님에 관한 깊은 대화를 한 적이 있는가?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생각해보세요. 없죠? 이상하죠? 그런데 이런 이상한 상황을 겪게 된다는 것을 오늘 예수님께서 6절에서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더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단, 두 사람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냐면, 이런 모임이 존재한다면 그곳을 ‘천국’이라고 여겨도 된다고 말씀까지 하셨죠.
“마태복음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구절은 ‘천국의 정의’에 관한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이름’은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 즉 예수님의 십자가 정체성을 날마다 날마다 묵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단 1 사람이라도 존재하면 그것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복음을 조금 안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그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하면 매우 거북해 합니다. 복음의 출발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상태가 저주받은 상태라는 것을 알아야 발생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내가 죄, 무능력, 무가치하다는 것을 동반하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다윗은 바셋바를 간음하게 하고 자신의 부하에게 거짓말을 하여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살인하고 결국 그녀를 도둑질하였습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 탐욕이라는 십계명 5개를 동시에 저질렀죠.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그런 다윗의 상태를 비유로 알려줍니다. 다윗은 그 비유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고 '복음'의 핵심을 다시 보게 됩니다.
이 에피소드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다윗과 같은 죄를 저지르지 말라~~ 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우리는 다윗과 같이 항상 죄를 짓게 되고 성령께서 오셔서 그것을 알려준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그로말미암아 나는 오직 예수님밖에는 소망이 없구나~~ 의 방향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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