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리아'의 말의 어원은 '마라'이며 마라의 뜻은 '쓴 물'입니다. 쓴물이란 못 먹는 물이죠. 구약에서 못 먹는 쓴 물에 나무를 던져서 먹을 수 있는 단 물로 만들죠. 여기서 나무란 십자가를 의미하고 단 물이란 '생명을 얻게되어 구원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즉, 마리아는 죄인된 교회 전체의 상징입니다. 그 쓴 물인 마리아를 풀어 헤쳐 놓은 것이 바로 1장 초반의 족보입니다. 이런 교회가 성령을 통해 예수를 낳죠. 즉, 선택받은 자가 이 세상에서 성령을 통해 복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조차 정확히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라고 하죠. 즉, 요셉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도구라는 뜻입니다. 이 요셉의 이름과 구약에서 야곱의 아들인 애굽의 총리 요셉이 이름이 겹치죠. 이것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입니다. 구약에서 야곱의 12아들 중 요셉은 가장 예수님과 가까운 상징이었습니다. 그 요셉으로 인하여 야곱의 12아들, 즉 구약의 선택된 자들, 즉 교회들이 구원을 받게 되죠. 이 역사의 의미를 그대로 가져와서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자, 즉 예수님의 탄생 전 예수님을 가리키는 가장 가까운 표지판으로 요셉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의 이름이 마리아, 아버지의 이름이 요셉인 것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라는 말이 단지 '착해서 조용히 파혼 하거나 율법적 심판을 하지 않는다'로 보면 안됩니다. 이 말은 '그는 예수님의 탄생을 복음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에 파혼 혹은 율법의 심판등의 인간적 결론에 묶여 해결하지 않고'라고 해석을 해야 합니다. 물론 그 당시 요셉의 의도는 어떤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사들의 해석은 이 요셉의 행위의 선함을 해석하죠. 그것은 '성경을 자의(인본주의)로 해석'하는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복음의 안경을 쓰고 해석을 해야 합니다. (오직 의로우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어떤 착한 사람이라도 이런 꿈 한번 꾼다고 내 자식이 아닌 애를 임신한 여자를 다시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으로 보니 이해가 되는 것일 뿐이지 현실에서 절대 벌어지는 일이 아니죠. 그런데 요셉은 이 사실을 한마디의 의심의 표현도 없이 받아들이죠. 그래서 '요셉이 의롭다'고 표현된 것입니다. 요셉이 착하다. 요셉이 복음을 잘 안다. 요셉이 영적으로 뛰어나다.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요셉이 의롭다'라는 것은 ' 하나님이 요셉을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로 이해하셔야합니다. 예수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의로운 자는 없습니다 . 그래서 성경에서 의롭다고 표현된 자들은 '이 자의 행동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니 이 사람 자체를 죄 없는 의인으로 보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 즉 이 사람을 참 의로운 자로 보게 되면 이 사람이 주인공이 되면서 이 사람이 가리키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표지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의 행위에 갇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 중에는 자식을 낳고 다윗, 바울, 요한 등으로 이름짓는 사람들이 많죠. 자식이 다윗과 같이 되라고, 바울과 같이 되라고 이름을 짓죠. 전부 그 표지판에 갇혀 버린 현상 중 하나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라는 구절은 100% 복음을 정의한 구절입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구절이 바로 '자기 백성'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구원할 대상은 정해져 있습니다. 즉, 천국백성은 이미 태초에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국백성들과 함께 영원한 천국을 살기 위해 '왜 너희가 나와 함께 영원히 살 수 있었는가?'를 한 번 쯤은 설명하셔야한 것입니다. 조금 다른 말로는 '너희는 나 없으면 절대 안된다. ' 또한 '나는 너희를 이렇게 사랑하다.'을 설명하시는 것이죠. 이 설명을 계획한 것을 복음이라고 하고 이 복음을 실행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이것을 알려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또한 이렇게 설명하시려고 만드신 공간과 시간이 바로 천지창조입니다. 그래서 이것의 설명을 들어야 하는 존재들이 오직 '하나님의 백성'뿐이죠. 그래서 양들이 자기가 속한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처럼 선택된 자들만이 복음을 알아듣는다고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뜻입니다. 이 뜻이 바로 성부 하나님이 복음을 계획하고 성자 하나님이 복음을 실행하시고 성령 하나님이 복음을 알려주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복음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다른 단어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상징적 표현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요한1서를 사랑의 책이라고 하죠. 요한1서에 나오는 사랑을 전부 전치사를 포함한 복음이라는 단어로 바꾸어서 읽으면 정확한 성경의 의도를 해석할 수 있죠.
그 유명한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사랑은 언제나~~'의 말씀도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복음은 언제나 온유하며~~' 입니다. 온유의 뜻은 '길들이다'란 뜻입니다 짐승이 주인의 손에 길들여지는 것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지위와 신분을 버리시고 짐승과 같은 죄인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고 그 예수님께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져 그 말씀대로만 사시다가 하나님의 마지막 사명인 십자가 사명까지 순종하신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는 이 말씀을 가지고 '오늘도 남편을 사랑하시려면 착하게 말 잘 들으세요. 그러면 가정이 편안해져서 행복해집니다. '로 바꾸어서 해석을 하죠. 어때요? 전혀 다른 기독교아닙니까?
그래서 이 사랑 장의 주체는 예수님입니다. 즉, 예수님이 온유함으로 나를 구원하셨다. 예수님이 오래참음으로 나를 구원하셨다. 등등 으로 해석을 하셔야 합니다.
끝.
'마태복음(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2:16-23(21.07.28.수) (2) | 2021.07.28 |
---|---|
마2:11-15(21.07.27.화) (2) | 2021.07.27 |
마2:7-10(21.07.26.월) (1) | 2021.07.26 |
마2:1-6(21.07.23.금) (1) | 2021.07.23 |
마1:1-17(21.07.21.수) (1) | 2021.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