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헤롯왕’은 유대의 왕입니다. 당시 유대를 식민지로 통치하던 로마의 황제는 아구스도 시저였죠. 시저(가이사)라는 말은 당시 황제를 뜻하는 칭호입니다. 예수님의 15세 정도까지 해당하는 시절은 아구스도가 황제였고 그 이후 십자가 사건까지는 디베료 황제입니다. 당시 로마는 통치하는 각 지역마다 자치왕을 두어서 제국을 관리했죠. 그 때 유대의 왕이 바로 헤롯입니다. 대왕 헤롯이라고도 하죠. 이유는 나중에 그 아들들이 유대를 나누어서 관리하는 왕들이 되죠. 그래서 아들 헤롯들과 아버지 헤롯을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매우 복잡하죠? 그러나 복음적으로는 이런 관계를 전부 꼭 알 필요는 없죠. 성경이 ‘헤롯 왕 때에’라고 시작하는 복음적인 이유만 알면 됩니다.
헤롯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을 다스리던 왕이었죠. 그런데 헤롯의 출신은 ‘에돔’입니다. 즉, 이스라엘인에게는 이방인이죠. 로마의 강한 압력 그리고 타락한 이스라엘의 조합이 ‘이방인 왕’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유죠.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인본주의 왕에 의해 다스림 받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구절입니다.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미가서5장 예언의 성취입니다. ‘벧’은 집을 뜻하고 ‘레헴’은 빵을 뜻합니다. 빵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빵은 양식이죠. 양식은 말씀이고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말씀,양식)이 나신 곳이기 때문에 베들레렘, 즉, 빵집이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입니다. 즉, 태어난 장소의 명칭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들의 양식은 예수님 뿐이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 왜 하필 동방에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동쪽 광야에서 요단강을 건너 서쪽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동쪽’은 광야인 인본주의의 고난을 가리키고 ‘서쪽’은 가나안땅인 약속된 땅(복음을 알 수 있는 땅)을 가리키죠.
‘박사들’은 영어성경에서 보면 wise men 이라고 표기 되어 있죠. 지혜있는 혹은 현명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지혜란 ‘복음을 아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을 알게 된 자들을 지혜로운 자라고 합니다. 잠언서를 지혜서라고 하죠. 잠언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똑똑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닙니다. 잠언서는 복음을 알려주는 길잡이 책이죠. 당시 ‘동방박사’가 정말 지혜로운 사람인지 아닌지에 관해 궁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이자들이 완전 무식한 사람들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 자들이 복음을 설명하는 것에 사용이 되어졌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의 역할을 맡은 것 뿐입니다.
‘그의 별을 보고’라고 했죠. 별은 빛입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죠. 즉, 복음되신 예수님을 정확하게 찾아온 것을 뜻합니다. 동방박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선택받은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선택받은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찾아가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것과 같은 이야기를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출애굽 스토리를 통하여 이야기했죠. 그리고 그 출애굽을 모티브로 다시 한번 지금 동쪽 방향에서 빛이 있는 곳으로 박사(복음을 알게 된)라고 표현된 선택될 자들이 찾아와서 경배를 드린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죠. 모순이 없는 복음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정확하게는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시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러나 아직 믿음의 분량이 되지 않는 우리에게 설명을 하시기 위해 이 땅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과 순서로 설명을 하시는 것 뿐입니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헤롯과 헤롯에 복종되어 있는 예루살렘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의 옛자아입니다. 정확하게는 헤롯은 우리의 옛자아를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내가 바로 나의 왕이죠. 그리고 그것에 묶여 있는 예루살렘은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아직 복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본주의 종교에 묶여 있는 ‘거듭나기 전의 나’입니다. 의미상으론 둘로 구분을 하였지만 결국 ‘나’ 하나입니다. 아직 거듭나지 못한 나는 사탄이라고도 할 수 있죠. 옛자아의 나는 예수님과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이 원수된 나를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이죠. 이 옛자아는 예수님이 나타나자 소동이 벌어진 것입니다. 나를 나에게서 예수님께 빼앗겨 버릴까바 두려운 것이죠. 물론 이 구절은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지만 영적인 실체는 이것보다 더욱 또렷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나온 김에 이 구절에 대한 묵상을 잠깐 해보죠. 이 유명한 구절은 나를 배신한 원수같은 놈을 꾹꾹 참고 사랑하려고 애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원수된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즉, 복음의 특성을 설명한 구절이죠, 사랑은 복음과 정확히 같은 단어라고 했었죠. 그래서 '예수님이 원수된 우리를 복음으로 구원하신다.' 가 바로 '예수님이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신다.' 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나에게 해를 끼친 원수된 놈들을 사랑할 필요가 없는가? 그런 사랑은 시도조차 할 필요가 없는가? 아닙니다. 해야합니다. 그것이 이 인생을 살게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꾹꾹 참아낼 수는 있죠. 그것도 사람 마다의 차이에 따라서 다르지만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나의 몸처럼 사랑하라'입니다. 그래서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죠. 그런데 불가능한지 어떻게 알죠? 노력 해 봐야 압니다 .더욱 진지하게 노력할 수록 더욱 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 (가능하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중이죠. - 이런 자들은 유기된(복음에서 버려진) 자들입니다. ) 이렇게 완벽하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갈 수록 우리는 마음이 가난해지고 애통해지죠. 그러나 이런 자들이 바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죠. 진정한 복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뜬 자들이 되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는 즉, 믿음을 갖게 되는 메카니즘입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 위의 말씀을 다시 한번 중복하여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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