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헤롯이 예수님을 찾지 못하여 그 지역에 사는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죠. 이것은 바로 출애굽 당시 장자의 죽음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떠난 자리 즉, 양의 피의 밖에 있는 자리는 모두 죽음밖에 없음을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헤롯이 어린 아이까지 죽인 것에 대한 독자의 인간적인 분노는 복음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왜 성경은 이런 전개를 그려야만 했을까? 이 장면은 과연 복음적으로 무엇을 나에게 설명하는가? 가 초점이 되어야합니다. 이 부분을 좀 더 묵상해야합니다. 그 이유는 그 다음 나오는 구절 때문입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조금 복잡하고 어려운 묵상을 해야합니다. 두 가지 에피소드를 하나의 소재로 엮어서 복음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라마는 베들레헴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의 이름입니다. 그 곳은 바벨론 포로 시대에 이스라엘 포로들의 집결지였죠. 즉, 부모와 자식 그리고 아내와 남편이 생이별하던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 곳은 라헬이 죽은 장소라고 추정되죠. 이런 방식으로 시간적 간격이 큰 두 에피소드를 연결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 후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해 애곡하는 것’이란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하거나 자식을 더 낳지 못한 것에 대한 애통함으로 평생을 지냈죠. 이 두가지 에피소드는 복음적으로 한 가지를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에게서 분리 된 교회를 애통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버림 당한 예수님을 뜻하기도 합니다.
정리를 해보죠. 예수님이 분리된 자리에서의 아기들의 죽음,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한 자들의 심판(바벨론 포로), 라헬의 자식 없음(본질적 결핍)의 애곡, 아담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됨. 전부 근본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려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겟세마네 동산의 고백기도입니다. 이 모든 것은 전부 같은 이야기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분리된 것이 ‘죄’라는 것을 말하고 있죠. 하나님을 잃어버린 그 결핍이 얼마나 애통한 것인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잃어버린 죄된 세상 속에 예수님이 선택한 신부가 섞여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땅으로 그의 신부를 찾아와 품에 안고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시는 것이죠. 이것이 복음의 스토리입니다. 이것이 마땅이 선택받은 자가 가지고 있어야할 세계관입니다. 이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것은 '눈을 뜬다'라고 하죠.
헤롯이 죽은 후 예수님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죠.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그 전에 들어가면 죽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성경에서 보면 예수님을 잡으려는 자가 예수님이 앞에 있는데도 잡지 못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성경은 절대 인본주의 시각으로 보면 본질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항상 복음의 기준으로 봐야합니다. 헤롯은 인본주의 왕이라고 했죠. 즉, 나의 옛자아를 가리킵니다. 고로 나의 옛자아가 죽어야 예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온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내가 나를 죽여서 비울 때까지 고행과 면벽을 일삼아 예수님이 들어오도록 노력하자’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이렇게 하고 있는 곳이 바로 불교죠. 성경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은 완벽하게 예수님이 우리를 비우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죠. 즉, 우리의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살게 된 이유가 바로 성경의 예언을 이루려 함이라고 하죠. 그런데 사실 구약에서 보면 이런 예언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적으로는 정확한 예언의 성취입니다. 즉, 당시 나사렛이라는 말은 ‘비천한 동네’라는 대명사였죠. 그래서 이사야가 예언한 ‘흠모할 것이 없는 메시야’의 의미를 성취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구유'에서 나셨다고 나옵니다. 구유란 짐승의 먹이통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짐승의 먹이로 오셨다는 것을 복음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부 다 짐승입니다. 이 짐승들이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고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뜻하죠. 복음적인 눈을 가지고 보면 이런 성경의 단어 한 글자에도 엄청난 은혜가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죠. 너무 너무 은혜롭지 않습니까?
나의 기준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기준으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은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과는 다른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복음에 누룩을 섞어서 모두 다 인본주의 종교로 바꾸어 버렸죠. 예수님을 닮아갈 수가 없는데 닮아가기 위해 노력을 하라고 합니다. 반대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어렵나요? 성화를 살펴보죠. '예수님을 믿은 이 후에는 성화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자.' 라는 인본주의 종교식 논리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목사들은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눈먼 자일 뿐입니다. 진정한 성화란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단 1도 성화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예수님의 필요성이 더욱 커지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복음적 성화입니다. 인간은 성화라는 단어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존재입니다. 이 성화라는 단어는 오직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단어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 성화라면 성화입니다. 즉, 예수님의 옷을 입고 그 안에 숨은 우리가 깨끗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내가 너무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자꾸 깨달아서 더욱 더 꼼꼼히 예수님의 옷 안에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기준을 버리고 예수님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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