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성소 휘장의 찢김'은 제사와 율법의 파괴를 의미합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라는 것은 '하늘의 뜻으로 땅의 것까지'라는 의미죠. '둘'은 증거의 숫자입니다. 이 세가지를 종합하면, 예수님을 가리키던 구약의 제사와 율법같은 모든 이 땅의 상징들은 이제 실체가 드러났으니 하늘의 뜻으로 쪼개졌음을 '확증'하는 것이죠. ( 이렇게 해 놔도 교회는 다시 그들의 제도로 율법을 만들고 지키는 것을 좋아합니다. )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죠. 땅은 인본주의를 가리킵니다. 바위는 인본주의에서 가장 단단하다고 믿는 것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인본주의를 그 근간에서 부터 흔들어 놓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본주의는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현대 지구 곳곳에서 발생하는 지진도 이것에 해당합니다.
'무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라고 하죠. 부활을 상징합니다. 기적에 촛점을 마추시면 안됩니다. 이 당시 이렇게 잠시 기적을 통해 이런 장면을 보여주신 이유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선택된 자들에게 복음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일 뿐입니다. 즉, '복음을 통해 너희가 이렇게 부활을 할 것이다'라는 강한 표현일 뿐입니다.
백부장과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 자들이 진심이었을까? 이 자들은 회개를 한 것일까? 이 자들이 구원 받았을까?' 이런식의 해석은 정말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본주의를 이용해서 복음을 설명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복음만 이해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들의 고백을 이용하여 복음의 핵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곁에 마리아들이 정말 많죠. 왜 예수님의 주변은 마리아가 많을까? 이것도 의도된 하나님의 메세지입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마라' 즉, 쓴 물(못먹는 물)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에피소드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쓴물인 마라에 한 나무를 던지니 ( 나무 = 십자가 ) 단물, 즉 먹을 수 있는 물이 되죠. 우리는 쓴물인데 우리가 십자가를 만나서 단물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계속 복음만 이야기하고 있죠. 이 길에서 벗어나시면 안됩니다. 그것은 맹인의 길입니다. 맹인들의 설교를 듣고 맹인의 길을 걸으시면 안됩니다. (A목사는 맹인, B목사는 복음 이런 말이 아닙니다. 이 글을 적는 저를 포함한 그 어떤 자도 다 맹인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성령께 의지하여 그 어떠한 설교라도, 묵상이라도 복음으로 읽어내시라는 말입니다. )
다음 장면 부터는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서 무덤 안에 장사를 치루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주도하죠. 잘 들으세요. 이 장면부터 요셉이 예수님의 상징이고 예수님의 시체가 우리의 상징입니다. 조금 어렵죠? 잠깐 다른 설명(이중괄호)을 하고 넘어가죠.
(( 인자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로 오신 것입니다. 구약의 '아가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상징인 솔로몬과 교회의 상징인 술람미여인의 사랑이야기가 나오죠. 그런데 읽다보면 매우 헷깔리죠? 관점이 왔다 갔다 해서 그렇습니다. 이 문장의 주어가 솔로몬인지, 술람미여인인지 분명치가 않죠. 그런데 그게 바로 메세지입니다. 우리가 곧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곧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지체라고 말하시고 한몸이라고 말하시죠. 이것을 인식하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내'가 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모셔야 하는 종교적인 접근만 하게되죠. ))
이해하셨죠? 그래서 예수님의 죽은 몸은 바로 우리가 되고 이 죽은 몸을 부활하기 전까지 보살펴주는 자인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가장 완벽한 예수님의 상징적 인물이 바로 요셉이죠. 요셉을 통하여 12지파 이스라엘을 가뭄에서 구원하죠. 이렇게 예수님을 가장 잘 표현한 구약의 요셉과 같은 이름의 요셉의 아들로 예수님은 태어나시게 되죠. 또한 같은 이름의 요셉이 장사를 치루게 하시죠. 이것은 전부 복음을 통일성 있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요셉이 '자기의 새무덤'에 예수님을 묻죠. 이 말씀은 바로 '내'가 가야할 무덤에 예수님이 대신 묻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나'대신 심판받으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으로 상징되는 요셉이 직접하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참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하시나요? 참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잡 종교와 그 격을 완전히 달리합니다.
죽은 몸의 예수는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그냥 인본주의라는 땅에 갖혀 있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이 세상과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적극적으로 막죠. 땅으로 표현된 인본주의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도저히 깰 수 없는 바위로 막죠. 그리고 굳게 지키죠. 절대 인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굳게'지킵니다. 이 '굳게'가 몇번이나 나오는지 말씀을 읽어보세요. 성경에서 2번 나오는 것은 매우 강한 강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3번을 강조하십니다. 이렇게 강조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강한 의도를 잘 파악하셔야 합니다.
바위는 땅의 요소 중에 가장 단단한 것을 가리킵니다. 왜 바위일까? 하나님은 이 속성 즉, '단단함'을 말하고 강조하는 것이죠. 이제 이 의미를 아시겠죠? 이 세상과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우리가 인본주의에서 절대 나올 수 없도록 인본주의의 가장 단단한 것으로 막고 그것도 모자라 인봉을 합니다.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나올 수가 없죠. 이 바위와 인봉은 무엇일까요?(각자가 생각을 해보세요. 자신을 막고 있는 인본주의의 가장 단단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렇게 바위로 인봉을 하는 이 세상의 인본주의 종교인의 진정한 정체는 '나'입니다. 정확하게는 나의 옛자아입니다.
이 장면에서 요한복음만 기록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리를 꺽지 않고 옆구리를 찔려 물과 피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잠깐 설명드리죠. 이 부분을 '사람이 정말로 죽게되면 혈청과 물이 분리된다.' 등등의 과학적, 의학적 의미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길에서 벗어나게 하죠. 복음적인 의미에 집중하세요. '예수님의 뼈가 하나도 꺽이지 아니하리라는 성경을 응하게 한다'고 나오죠. 이것은 예수님의 지체 중 단 하나도 꺽이기 않을 것이라는 것, 즉 선택된 자들 중 단 하나도 구원에 대한 계획을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옆구리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탄생한 하와를 가리키죠. 즉,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 관계는 오직 예수님의 피(희생)와 물(은혜)로 이루어진 것임을 가리킵니다.
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는 성경을 응한다'라는 말씀 중에 '그들'의 정체는 우리(교회)입니다. 너무 너무 가슴이 아프지만 우리가 살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팔고 십자가에 매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진짜로 죽으셔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이 정말 죽었는지 다시한번 찔러바야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피(희생)로 그리고 물(은혜)로 우리는 구원을 받게되죠. 이것이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이것을 1천5백년 동안 유대인들에게 계속 반복해서 설명하신 것이 바로 구약의 제사입니다.
제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유대인은 '제사 잘지내기'에 묶여 버리죠. 그것을 바리새인이라고합니다. 그 바리새인을 바로 현대의 '교인'이라고 합니다. 주일을 성스럽다고 포장해서 온갖 휼륭한 교인을 양성해 내죠. 그것에 갖혀서 그 모든 것들이 가리키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들죠. --- 교회에서 두,세 사람이 모여서 수다떨기를 할 때 '예수님의 본질'에 대하여 이야기한 장면을 단 한번이라도 본적이 있나요? 없으시죠? 대부분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 사는 이야기, 남의 험담, 자기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 뿐일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