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28:1-7(22.03.24.목)

은혜바라기 2022. 3. 24. 08:58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오늘 말씀은 안식일이라는 낱말부터 시작을 합니다. 안식일의 개념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쉬는 날? 하나님이 쉬는 날? 이 '쉰다'라는 의미를 복음으로 연결하지 못하고 '내가 노동을 쉬고 놀자'로 받아들이면 길에서 한참 벗어난 것입니다. 또한 주일을 안식일의 의미로 지켜서 '그 날은 목숨을 걸고라도 일하지 않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라고 하는 것도 길에서 한참 벗어난 율법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를 평생을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 노력을 1도 쳐주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은 인간이 만든 종교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다는 정확한 의미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만든 천지창조는 더 이상 손댈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끝냈다. 여기에 누구라도 손을 대면 안된다.'의 선언입니다. 이 복음의 완성이 바로 예수님이시죠. 그래서 안식일의 진정한 실체는 일요일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입니다. 즉, 안식일을 완벽하게 지키라는 의미는 바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그 분의 지체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안식일을 지켜야 천국간다는 말은 주일성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체가 되어야 천국간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지키는 안식일 대용인 주일날은 그냥 상징일 뿐입니다. 안 지켜도 상관없어요. 그러나 주일은 안 지켜도 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복음을  완벽하게 다 이루셨음을 인정하는 것'은 믿고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주일을 지켜라'는 신율법에서도 자유합니다. (코로나로 교회의 문을 잠시 막으신 하나님의 의도를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은 바로 8일입니다. 즉, '안식일이 끝난 다음 날'로 표현이 되어 있죠. 그럼 이 8일의 개념은 무엇일까? 인본주의는 8일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1일로 넘어가서 이 땅의 일주일을 다시 반복하며 살죠. 그러나 우리는 8일로 넘어가야 합니다. 좀 더 풀어서 말씀드리면, 1-6일이라는  이 땅에 묶여 사는 동안 복음을 알게 된 자들은 진정한 안식인 예수님의 7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8이라는 영적세상의 범주인 복음의 진영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1-6일이라는 이 땅에 묶여서 그 땅만 의지하여 살면 가짜 7일에 묶여서 7을 인본주의 혹은 인본주의 종교, 즉 '놀자, 쉬자' 혹은 '일요일을 성스럽게 지키자'에 묶여 버리게 되고 그런 자들은 다시 1-6이라는 이 땅의 인본주의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영원히 맴도는 이 땅(지)에 묶인(옥) 자가 되죠. )

 

 여기서도 마리아 두명이 계속 나오죠? 마리아라는 이름의 의미는 마라 즉, 쓴물 입니다. 구약에서 모세가 이 쓴물에 나무를 던져 단물로 만들어서 먹을 수 있는 물, 즉 생명의 물로 만들죠. 이것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쓴물(죽은자)를  예수님의 십자가(나무)로 단물, 즉 생명으로 만는 것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큰 지진' 땅을 흔든다는 것은 인본주의의 근간을 하나님께서 흔드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가장 믿는 땅(지구)를 흔들어서 인본주의는 우리가 믿을 것이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주의 천사가 돌을 굴리고 그 위에 앉죠. 돌은 인본주의에서 가장 단단한 것을 의미하고 그것을 깔고 앉는 것은 그것을 다스리는 권한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인본주의의 가장 단단단 것 조차 하나님의 발밑에 깔리는 존재라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죽은 사람과 같이 된다'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즉, 선택받지 못한 모든 자들은 전부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이 마리아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 아노라'라고 하고 '그가 여기 계시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절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신적 우상화'로써 최종 목표를 삼으면 안됩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여기에 넘어갑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신으로 삼아 열심히 믿는 것' 이 말이 매우 진리인것 같죠? 어쩌면 이 말이 복음으로 넘어가기 전의 마지막 고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맹인 지도자들이 이 말로 진리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계시지 않는다.'라고 표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인들은 전부 다 무덤에서 예수님을 찾는 자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거기 없죠. )

 

 진리는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스토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스토리를 복음이라고 하죠. 그런 예수님은 벌써 우리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서 계신다고 합니다. 즉, 내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에게 오셔서 그 분의 정체성을 알려주시는 것이죠. 결국 우리는 긍휼과 은혜를 바라는 것. 그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죠. 이것이 바로 '안식(우리는 아무것도 할수없음)'의 개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예수님을 신으로 여기고 소원성취하는 인본주의 종교에서 벗어나 진짜 하나님의 복음(사랑)을 해석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죠. 성령께서 오셔어 우리에게 '의'의 예수님을 정확히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인'인 것을 정확하게 알려주시죠. 그리고 심판에 관하여 알려 주십니다. 이 세상에 말씀의 은혜(물)을 퍼 부우시고 그 은혜의 물 위로 뜨는 자들을 구원받은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개는 그 은혜의 물에 빠져 죽게 되죠. 그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말씀 안에는 '복음'이 비밀스럽게 담겨 있습니다. 이 복음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이 복음이 이 땅에서 실체화된 분이 예수님이시죠. 구약에서 이것을 상징적으로 형체화시킨 것이 바로 '방주'입니다. 이 방주의 설계를 매우 구체적으로 몇 규빗, 몇 규빗 이렇게 성경에 일일히 적으신 이유는 바로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이 일일히 계획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 안에 있는 복음을 알게 된 자들이 바로 방주에 탑승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알게 된 자들을 말하죠. (그래서 노아의 가족만 탑승하게 됩니다. '가족=지체=한몸'을 설명하시고자 하신 것이죠)

 

 그런데 그 '말씀의 겉'에만 머무르게 되면 바로 그 말씀의 엄청난 무게에 다 빠져 죽게 됩니다. 10계명을 비롯하여, 613가지 율법, 2134가지 율법의 세분화, 기타 파생된 장로의 유전, 그것에서 파생된 모든 나라의 법, 질서, 규범들, 또한 신율법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 교회의 규칙과 제도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노아의 방주 시절 하늘에서 쏟아 내던 물(말씀)입니다. 그 안에는 사실 '복음'이라는 방주가 담겨 있죠. 

 

 ((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에는 방주의 근처에서 방주를 눈으로 보고 이해해보려고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방주는 탑승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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