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성경에서 여자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여자들이 그분을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이 여자들로 표현이 되어 있죠. 교회가 예수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전서14장에 보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도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그 분의 신부인 교회, 즉 여자는 그 부분에 관하여 어떠한 것도 할 것이 없는 안식의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 성별로써의 남,여 중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자코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
오늘 말씀에서 보면, 부활을 지켜본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거짓으로 꾸미죠. 결국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잘 못 해석하여 전파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복음'을 잘 못 해석하여 전파할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제 선택받은 자들인 교회를 상징하는 제자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대면하는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을 같이 살펴볼께요. 순서없이 중요한 부분만 묵상해보죠.
제자들과 예수님의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서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은 예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면 절대 보고 들을 수가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라고 하시죠. 예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예수님을 전혀 다른 정체성으로 인식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 교회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다 제각각으로 '자기만의 예수님'을 만들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누가복음은 더 깊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에게 떡을 축사하시고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라고 하시죠. 즉, 예수님이 은혜(떡)를 베풀어야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이 더 깊은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라고 되어 있죠. 이상하죠?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니 예수를 볼 수 없다??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예수의 진짜 정체성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인자 예수님에게 국한 되었던 인본주의적 시각(눈)에 의존했던 믿음이 이제는 부활하신 영적인 예수님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리해보면, '복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안나오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믿지 못해서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게 하시면서 믿게 만드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본주의적 해석은 배제하고 복음으로만 해석해보죠. 손과 옆구리의 자국은 결국 십자가를 의미하죠. 결국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믿음을 위해 필히 십자가(손과 옆구리)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는 두가지 뜻이 있죠. 첫째.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둘째. 우리 또한 고난을 직접 경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의 복음을 인식할 것이라는 것이죠. 즉, 십자가를 손으로 직접 만져 볼 만큼의 손에 닿은 고난을 통해 복음을 알아갈 것(예수님을 느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묵상해보죠. 이 부분은 우리의 선교(전도) 사명을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전도)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를 찾아 그분의 지체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선교에 대한 정의를 굳이 내린다면 '억지로 하게 된다' 입니다. 선교를 꿈, 희망, 거룩한 사명, 소명의식을 가지고 한다는 그 마음은 사실 잘못된 말이죠. 그러한 마음의 저편은 오직 '나의 가치 실현'일 뿐입니다.
왜 복음에서는 전도(선교)를 이런 관점으로 보게 될까요? 선교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도 선교하기 싫어서 도망갔다가 잡혀오고, 모세도 몇번이나 사역을 거절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죠. 바울도 잘 되는 교회쪽으로만 가려다 하나님께 제지 당하죠. 결론적으로 예수님도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시죠. 하물며 예수님도 힘들어서 하나님께 간구한 이 사역을 인간이 즐거운 마음으로 소명의식을 가지고 한다고요??? 이 마음의 깊은 중심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말년의 바울이 깨달아 한 말이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결론입니다.
이 부분은 매우 깊은 고찰이 필요합니다. 조금 더 자세히 풀어서 설명을 해드리죠. 우리나라에서 획기적으로 교회의 양적 팽창이 있었던 시기가 바로 여의도 순복음 교회입니다. 특히 '랄랄라'방언을 통해서죠. 전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죠. 이것이 바로 인간이 생각하는 '전도, 선교'의 본질입니다. 즉, 인간의 전도는 그 본질이 '엉터리'입니다. 전부 다 교회의 양적 팽창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죠. 혹은 명예, 인기, 심지어 돈까지 결부가 되어 있습니다. 혹은 '자기의' '자기칭찬'도 들어 있죠. 심지어 '하나님께 칭찬 듣기 (내가 이 정도로 구원에 한 몫하고 있다구요~~)'를 의도하고 있는 것이죠. 전부 다 복음과는 거리가 먼 이유를 가지고 움직입니다.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 수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천국은 그물을 치고 그 이후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고르는 것'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즉, 인간의 전도는 사실 하나님께서 그 행위들을 이용해서 그물을 치는 것일 뿐입니다. 진짜 전도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께서 하시죠.
이 마태복음의 마지막은 우리가 할 선교의 사명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하실 일을 소개하는 것으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경을 우리의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으로 보는 것이죠. 천국에서 영원토록 같이 살 진짜 나의 형제들을 예수님께서 틀림없이 찾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선교 소명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전도라는 행위를 일절 하지 말아야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적 생각입니다. 이 생각에는 '그렇다면 인간이 전도라는 행위가 필요없다고 생각하여 절대 전도를 안하면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라는 인과율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느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전혀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서 애초에 설명이 안되는 것이죠.
말씀은 그 자체로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즉, 말씀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이 세상(자연,우주,역사)은 말씀에 순응하게 되죠. (인간의 눈, 즉 인간의 논리에 이해가 되는 순응이 아닙니다.) 즉, 자연스럽게 말씀대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도 성경에 기재가 되어진 순간 온 세상이 복종하여 자연스럽게 순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짜 전도는 성령께서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 나누기'로 하시는 것이죠.
이 부분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대한 것까지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너무 많은 분량이 될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아마도 복음을 이해하는 분이라면 전부 이해가 되셨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나중에 전도와 선교에 대한 것도 특별묵상으로 한번 다루겠습니다.
오늘로써 마태복음이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주 부터는 야고보서를 묵상하겠습니다.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