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오늘은 바울의 아덴 설교 마지막 묵상입니다. 아덴은 심히 종교성이 많은 도시였죠. 성령께서 이 도시를 선택하여 성경에 기록하신 이유는 현대 교회들이 바로 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묵상에서 인간의 역사와 인생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 것이라고 했었죠. 심지어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고 인간은 원래 그분의 소생이라고 선언까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의 본질을 종교적으로만 접근하면 하나님을 결국 ‘우상화’시키는 것뿐이라는 것이 어제 묵상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30절 보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지만 이제는 회개하라’고 하시죠. 그런데 여기서 조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할까요?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성령께서 그 시대의 모든 패러다임을 사용하여 현재 이 글을 읽고 있는 나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고로 ‘알지 못하던 시대’를 그 당시 역사 속의 어느 한 시점으로 이해하여 그 당시와 나는 상관없는, 즉 역사의 어느 시점 정도로만 치부하면 절대 안 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라는 것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성령께서 복음을 알려 주시기 전’이라고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다’라는 이 말씀을 ‘아~~ 내가 알지 못했으니까 모르고 벌린 일들은 다 용서 해주시나부다~~~’ 라고 해석을 해버리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복음을 알려 주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 어떠한 방법으로도 복음을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렵죠? 예를 들어 보죠.
부모가 현관 비밀번호를 바꾸고 아들에게 그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해보죠. 그런데 그 집의 규칙이 저녁 10시에 귀가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비밀번호를 몰라서 10시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할 때 그 부모는 그날은 아들을 혼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부모가 10시 귀가에 대한 규칙을 ‘간과’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10시 귀가 규칙’이 아니라 ‘부모가 아들에게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아들은 절대 집에 들어올 수 없다.’입니다.
이후 30절 후반절,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라는 말씀도 ‘이제 복음을 알게 되었으니 회개해야 하는구나~~’가 초점이 아닙니다. 이런 방향성의 해석은 아직도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오직 인간 중심의 해석에서 오는 착각입니다. 이 말씀의 초점은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그 명령이 내려짐과 동시에 의미적으로 실현이 되는 것입니다.
즉, ‘내가 회개하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해서 내가 회개하게 된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회개는 반성이 아닙니다. 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회개는 내가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즉 오직 복음만 소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성령께서 복음을 알려주시면 그 복음으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회개가 따라옵니다.(울고 짜는 반성이 아닙니다. 모든 세계관, 역사관, 인생관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성이 내가 변하는 것이 초점이라면 회개는 나의 방향에서 예수님의 방향으로 기준이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반성은 내가 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초점이고 회개는 내가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것이 초점이 되죠.
그래서 31절에 ‘정하신 사람’이 결론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죠. 당연히 정하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왜 예수님이라고 하지 않고 ‘정하신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바울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복음을 알게 되면 예수님이라는 신을 믿거나 섬기는 것이 잘못된 방향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고 그것을 믿는 것과 같은 방향성이죠. 우리가 진짜로 믿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믿기 위해서는 그 분의 정체성을 알아야 하죠. 그런데 그분의 정체성은 오직 성령께서만 알려 주시기 때문에 결국 선택된 자들만 알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를 마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죠. 왜 ‘이름’ 일까요? 바로 이름이 ‘정체성’입니다. 인본주의 종교에서는 예수님이라는 신을 걸고 소원을 비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알게 된 자들은 기도를 하고 그 기도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지 고민하죠. 즉,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는 기도의 마지막에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기도하실까?’의 고민을 하는 시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를 알아야겠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은 31절에 예수님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다고 하지 않고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한다.’라고 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라는 세 글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 중의 하나인 ‘지정하신 사람’을 드러낸 것이죠. 오직 구원과 심판을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정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1절 후반절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고 합니다. 복음의 핵심입니다. 부활입니다. 즉, 선택받은 자들이 부활한다는 것을 완벽하게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부분도 예수님의 여러 정체성 중에 하나죠. 즉, ‘부활의 가장 첫 열매’라는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32절 보면, 두 부류로 나누어 집니다. 어떤 사람은 조롱을 하고 어떤 사람은 다시 듣고 싶다고 하죠. 이렇게 나누어지는 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심판의 참 본질은 이 세상이 멸망하고 염라대왕 앞에서 ‘너 지옥, 너 천국’이라는 이야기책이 아닙니다. 이것 또한 인본주의 영향이죠. 심판의 참 본질은 그 사람의 인생에 복음이 떨어질 때 그것을 알아듣느냐? 못 알아듣느냐?입니다.
복음을 알아듣게 되면 마지막 34절처럼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의 형태가 되죠. 여기서는 바울이 예수님의 표지판이므로 결국 복음을 알아듣게 되면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것, 즉 예수님과 한몸이 되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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