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18:1-4(22.09.23.금)

은혜바라기 2022. 9. 23. 08:59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18장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부부가 바울과 함께 동역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비량 목회, 자비량 선교를 이야기할 때 마다 반듯이 빠지지 않고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바울은 천막을 만들어 돈을 벌어서 목회를 했다.’입니다.

 그러나 이 18장에 나온 ‘천막 만들기’의 촛점은 자비량 이야기가 아닙니다. 천막은 성막을 의미합니다. 성막은 장막, 성전, 교회를 의미합니다. 즉, 바울이 천막을 만든다는 것은 바울은 오직 복음 전파를 통한 교회 만들기에 전념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죠. 하지만 여기서의 바울은 바울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표지판입니다. 즉, ‘바울의 천막 만들기’는 ‘예수님의 교회 만들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목회를 자기 돈으로 하냐? 남의 돈으로 하냐? 의 논쟁을 하는 것은 그것이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그 논쟁으로 인해서 참 본질을 놓치는 길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 사탄의 전략이죠. 

 

 다시한번 사도행전의 방향성을 잘 잡아야합니다. 바울이 스스로 '교회 만들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천막 만들기'라는 생업을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돈이 필요해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 상황을 성경에 기록했다는 것은 그것이 복음을 설명하는데 좋은 도구라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절대 인물과 역사 중심적 해석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그냥 역사 혹은 종교가 되어 버립니다. 성경은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 성경을 통해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전지적 성령 시점'으로 봐야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천막 만들기는 혼자가 아니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부부와 같이 하는 것으로 표현이 되있죠. 즉, ‘예수님의 교회 만들기’는 예수님이 그분의 신부들과 함께 만들어 간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단 3줄의 구절 속에서도 복음의 핵심이 전부 설명이 되어 있죠? 

 그래서 4절에 보면, 안식일 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권면한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즉, 완성된 교회의 모습을 살짝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완성된 교회를 천국이라고 합니다. 즉, 천국은 안식일의 진정한 정체인 예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말씀을 양식으로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안식일은 일요일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진정한 정체는 예수님입니다.)

 ‘천막’에 대한 것이 오늘 묵상의 초점이므로 잠시 장막절에 대한 묵상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유대인의 3대 명절은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입니다.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안식일의 본질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처럼 이 3대 명절도 모두 예수님을 가리키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 중에 오늘은 장막절에 대해 짧은 묵상을 해 보죠. 

 장막절은 초막절 혹은 수장절이라고도 불립니다. 겉으로 보이는 의미는 추수한 곡식에 대한 감사와 그것을 저장하고 지키는 의미의 명절이죠. 이날에는 7일동안 초막에 거주하고 노동을 금지했죠. 그리고 매일 아침 제사장이 제단에 물을 붓죠. 그리고 촛대를 세우고 촛불이 끊어지지 않게 계속 기름을 채웁니다. 하나 하나를 전부 들여다 보죠. 

 복음적으로 추수하는 곡식은 바로 교회를 가리킵니다. 즉, 선택받은 모든 자들을 가리키죠. 예수님께서 선택받은 자들을 천국에 거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7일동안 초막에 거주해야 한다는 것은 7이 가리키는 천국에 거주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7은 3+4입니다. 이 땅(4)에 살고 있는 선택받은 자들이 눈을 떠서 복음(3)을 알게 된다는 것이 7입니다. 그리고 이 자들의 전부 모여 있는 모임을 교회(12=3*4)라고 합니다. (신약의 12제자, 구약의 12지파 모두 교회를 가리키죠. 최종적으로 계시록에 나온 인친받은 모든 자들의 숫자가 144,000명이라고 기록한 이유는 12*12*1,000(완전수) =144,000 인데 그것은 신약과 구약, 즉  전체 역사에 존재한 모든(완전한+온전한) 교회들의 모임을 뜻합니다. )

 

 그리고 노동을 금지한 것은 오직 구원은 예수님 홀로 이루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꺼지지 않는 촛대는 빛되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선택받은 자들이 전부 천국 백성이 될 때 까지 예수님께서 꺼지지 않은 빛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꺼지지 않는 촛대를 위해 계속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름은 모두 성령을 뜻합니다. 


 매일 제단에 물을 붓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물은 심판과 은혜의 기능을 동시에 하죠. 그 은혜의 물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실체는 바로 예수님이시죠. 

 보시면 아시겠지만, 결국 장막절의 모든 규례는 전부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그 표지판들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이 하나씩 하나씩 나열되어 쓰여 있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눈을 뜬 자들에 국한합니다. 

 

 그러나 유기된 자, 즉 심판받는 자들은 오직 그 행사(행위)에 머물게 됩니다. 즉, 7일동안 텐트속에 앉아서 있으면 '난~이렇게 잘 지키고 있으므로 구원받는다~~'라고 그 행위를 목숨걸고 지켰겠죠.  여기에 묶여 버리면서 진짜 그 안에서 설명하는, 즉 그 안의 진짜 보물인 복음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더 심각합니다. 교회의 제도, 규칙, 규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겉에 예수님이라는 종교로 도금칠을 해놓았기 때문에 여기에 묶인 자들이 참 예수님을 보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말세는 진리의 전쟁터입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는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두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범주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죽음 그 자체이고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땅에서 죽은 자들이 그 죽은 손으로 종교활동을 한다고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제사(종교)를 허락하신 이유를 잘 생각해야합니다. 이 제사(종교)는 하나님이 만드신 영적 산물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하나님이 죄된 인간의 행사를 허락하신 것이죠. 그것을 통해 복음을 설명하시는 방향으로 섭리하시는 것 뿐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 복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교회를 벗어날 수 없으면 교회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

 

 창세기를 보면,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짐승의 가죽을 입혔습니다. 이 짐승은 인간을 위해 희생된 것으로 예수님을 가리키고 예수님을 가르치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런데 아벨은 양을 가지고 제사를 지냈고 가인은 농사물을 가지고 제사를 지냈죠. 그리고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았죠.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아벨에게 제사를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즉 이 제사라는 행위는 아담이 하나님으로 부터 짐승의 가죽 받으면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스스로 만들어낸 기념행위라는 것입니다. 

 

 정말 정말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아담은 결국 죄로 인해 제사(종교)라는 행위를 만들어 낸 것 뿐입니다. 스스로 그것을 위로의 행위로 삼은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그 아들에게까지 가르쳤겠죠. 하나님은 절대 이것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고 성경에 기록이 된 이유는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의 뜻, 즉 짐승의 희생이 예수님의 희생을 설명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잘 표현할 수 있다는 긍정의 표시입니다. 반대로 가인은 농산물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고 그것을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죠. 그것은 가인이 방향성을 잘 못 이해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즉, 가인은 '지극정성으로 하나님께 내가 가장 소중이 생각하는 것을 드리는 제사 행위'에 촛점을 가진 것이죠. 즉, 가인은 정말 '제사(종교)'그 자체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그 제사(종교)를 받지 않으셨다고 표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5대 제사들, 십일조와 각종 규례들 이 모든 것들은 그 당시 근동지방에서 이미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종교활동을 할 때 행했던 것들입니다. 더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종교활동은 결국 죄인들, 곧 죽은 자들의 행위의 결정판일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해당이 되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제사행위를 이용하셔서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눈을 뜨게 되면 이 제사(종교)행위를 벗어나게 되고 이 제사(종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설명하시는 복음을 알아듣게 되는 것이죠. 지금은 이 제사(종교)의 자리를 기독교(종교)가 맡고 있는 것 뿐입니다. 

 

P.S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시간 나실 때 마다 묵상하세요. 핸드폰에서는 첫 화면 중간에 보시면 “분류 전체보기”를 보시면 됩니다. )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과 공휴일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18:12-17(22.09.27.화)  (1) 2022.09.27
행18:5-11(22.09.26.월)  (2) 2022.09.26
행17:30-34(22.09.22.목)  (1) 2022.09.22
행17:26-29(22.09.21.수)  (1) 2022.09.21
행17:24-25(22.09.20.화)  (2) 2022.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