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성령께서 바울의 발걸음을 베뢰아에서 아덴으로 옮기셨죠. 당연히 바울의 입장에서는 ‘도망’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렇게 유도하신 이유는 바로 아덴에 주님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아덴에 도착하자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하여’ 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 ‘격분하여’라는 감정이 옳습니까? 가끔 뉴스에 보면 기독교인이 절에 방화를 저질렀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자는 본인이 하나님을 위해 이런 일을 했다고 생각을 하겠죠. 아마도 거짓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이죠.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참 복음을 아는 자들은 그것을 알죠.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믿음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바울의 ‘격분하여’라는 감정도 '옳다' 혹은 '그르다'고 판단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감정을 이용하신 성령님의 손가락을 봐야 합니다. 이렇게 격분한 바울은 다른 도시와는 다르게 매우 강력하게 아덴 사람들과 ‘논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이 논쟁을 통해 여러분께 더 깊은 복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죠. 즉, 성령께서는 바울의 ‘격분’이라는 감정까지 섭리하셔서 복음의 가르침의 깊이까지 조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에덴이라는 도시는 철학과 신화와 각종 종교가 난무한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상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죠. 사실 이런 모습은 지금의 인본주의의 한 모습입니다. 다양하고 복잡한 과학과 이념 그리고 각종 종교가 판을 치는 지금의 세상이 바로 이러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아덴 에피소드가 필요하셨던 것이죠.
23절 보면,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종교까지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모든 인본주의 종교의 정체성입니다. 모든 종교는 그들이 믿는 신이 있지만 사실 그 신은 모두 허상이죠. 즉, 알지 못하는 신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인간이 만든 가짜 신입니다. 그래서 인본주의 종교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죠.
이런 우상은 왜 생겨 날까요? 우상의 정체는 바로 ‘나’입니다. 인간은 짐승과는 다르게 종교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종교성을 가지게 된 이유는 바로 인간의 근본이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던 영적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면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죠. 그러나 인간의 깊은 내면에는 ‘하나님과 소통했던 통로’의 흔적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과 소통했던 흔적’ 때문에 종교성을 지니고 있죠. 또한 그 종교성은 ‘절대 고독’으로도 표현이 됩니다. 즉,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지체로 존재했을 때에 온전해 질 수 있도록 창조되었지만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되었죠. 그래서 지금은 절대 치유할 수 없는 ‘절대 고독’이 늘 깊은 내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관계, 사회생활을 하며 그것을 통해 그런 절대 고독을 이겨내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러나 절대 그런 ‘절대 고독’은 치유가 될 수가 없습니다. 더 많은 군중 속에 있을수록 더 많은 고독이 찾아오는 셈이죠.
이렇게 ‘하나님과 소통했던 흔적’이 만들어낸 것이 종교성입니다. 즉, 그 흔적을 채우려고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노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종교성이죠.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일이죠. 우리의 방향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상이란 ‘내가 바라는 것’을 객관화해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통로의 모습(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통로를 통해 내가 바라는 것을 소망하는 시스템일 뿐입니다. 결국 그 소망이라는 우상의 진정한 정체성을 들여다보면 ‘잘살고 있는 나’ 일뿐이죠. 그래서 결국 우상은 곧 ‘나’죠.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무교인들은 ‘나는 나를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두 부류는 같은 것을 믿는 것입니다. 바로 ‘나’죠.
이제 바울이 22절에서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절에 ‘알지 못하는 신’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이유를 아시겠죠?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렇게 어리석은 우리에게 격분한 바울을 이용하여 24절 부터 매우 자세한 복음을 설명합니다. 내일은 24부터 복음의 알맹이에 대하여 묵상하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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