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5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6절에서 그들은 바울을 대적하고 비방하죠. 그런데 바울의 태도가 조금 특별합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그렇게 자신을 대적하고 비방한 유대인을 위해 바울은 더욱더 기도하며 복음을 전파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의 피가 너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라고 합니다. 이 6절을 묵상하기 위해 마태복음을 잠시 보겠습니다.
“마10:14-1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바울도 예수님께서도 모두 ‘옷을 털다. 먼지를 떨어 버리라’는 말씀을 하시죠. 그 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청결’이라는 정의를 내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여기서부터 묵상을 시작해야 합니다.
청결(정결, 성결)의 본질이 뭘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결을 더러운 것을 치우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50%의 정답입니다. 하얀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더럽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얀 눈이 내 차를 덮으면 우리는 그 눈을 치우죠. 새로 지은 하얀 쌀밥을 더럽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얀 쌀밥을 화장실 바닥에 뿌리게 되면 우리는 화장실이 아닌, 하얀 쌀밥을 치웁니다. 즉, 더럽다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청결의 개념에서 주관적인 관점을 배제하고 그 본질을 들여다보면 청결의 본질은 바로 ‘분리’에 있습니다. 즉, 같이 있으면 안 되는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할 때 그것을 분리시키는 것이 정확하게 ‘청결(정결, 성결)’의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같이 있는면 안 되는 두 존재는 무엇일까요? 정확하게 인본주의와 복음입니다. 복음이 사람들에게 떨어질 때 그것을 알게 된 자들과 모르는 사람으로 나누어지죠. 그리고 성령께서는 매우 강력하게 이 두 존재들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옷을 털면서 ’는 분리를 가리키는 것이고, ‘너의 피가 너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은 심판을 말하는 것이고 ‘나는 깨끗하니라’라는 것은 분리의 반대편에 서 있는, 즉 복음의 진영에 있는 나는 구원을 받는 편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로 하죠. 유대인은 이방인을 ‘더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이방인에게 간다고 하죠. 아까 예로 말한 흰쌀밥과 화장실의 개념입니다. 대부분 흰쌀밥이 깨끗하고 화장실은 더럽다고 생각하지만 화장실에 흰쌀밥이 뿌려지면 화장실을 부숴버리는 것이 아니라 흰쌀밥을 치워버리죠. 관점의 차이에 의해 바뀌어 버립니다. 이런 관점에서 유대인에게 이방인은 더러운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들이 선택된 자들이라면 오히려 깨끗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7절을 보면, 바울은 ‘거기서 옮겨’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분리’의 결과입니다. 이후 바울은 그곳에서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복음을 전하죠. 이렇게 오랜 기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9-10절의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이 부분도 조금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일단 바울에 대한 오해부터 풀고 넘어가죠. 오늘 바울의 상태를 보면서 ‘정말 휼륭한 일을 열심히 하는구나~~’라는 관점을 벗어나야 성경을 제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비난 받아서 도망친 것뿐입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기록하여 우리에게 복음을 전달한 것입니다. 바울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냥 비겁한 놈일 뿐입니다. 즉, 나와 같죠.) 그래서 9절에서, 굳이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즉, 유대인에게 호되게 당하고 겁쟁이가 되어버린 유치원생 바울을 달래고 얼래가며 환상을 써서라도 그를 이끄시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위대한 선지자로 바라보는 인물 중심 사고에 갇힌 사람들은 절대 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정말 스스로 굳건한 선지자라면 하나님께서 굳이 환상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안 하셔도 바울은 훌륭하게 복음을 전했겠죠. 이것이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바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이런 겁쟁이 유치원생 바울을 하나님은 인자와 위로의 말씀으로 이끄신다는 관점으로 다시 한번 9-10절을 읽어보세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와 닿을 것입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
이와 같은 일환으로 7-8절도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바울이 도망친 후 만난 두 사람은 디도 유스도와 그리스보입니다. 그런데 이 자들에 대한 소개를 잘 보세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 그리고 '그 집의 바로 옆에 위치한 회당과 그 회당장 그리스보라'고 소개를 하죠. 즉, 바울의 열심으로 이들이 복음을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를 해 놓으셨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시나요? 즉, 바울이 초점이 아니라 성령님의 열심이 초점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도망가는 바울은 자기가 한 일도 없이 들어가는 집마다 족족 복음을 믿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므로 ‘이게 왠 일(떡)이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9-10절에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환상을 통해 위로를 했다면, 7-8절은 상황을 조절하심으로 위로를 한 것입니다. 느끼십니까?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열심’ 이지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도들을 통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도구에 집중하지 마시고 그 도구를 들어 쓰는 하나님의 열심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끝
'사도행전(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18:18-23(22.09.28.수) (1) | 2022.09.28 |
---|---|
행18:12-17(22.09.27.화) (1) | 2022.09.27 |
행18:1-4(22.09.23.금) (4) | 2022.09.23 |
행17:30-34(22.09.22.목) (1) | 2022.09.22 |
행17:26-29(22.09.21.수) (1) | 2022.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