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20:22-38(22.10.11.화)

은혜바라기 2022. 10. 11. 09:16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22-23절 보면, 성령께서 바울에게 ‘너는 예루살렘으로 가라~ 그리고 그곳에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릴 것이다.’라고 계시했다는 것이 나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표현이 나오죠. ‘나는 성령에 매여’라는 구절입니다. 

 ‘매여’는 강요당한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영어 성경에도 ‘compelled(강요당하는~)’라고 되어 있죠. 즉, 바울의 마음과 성령님의 의도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고, 갈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바울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이런식으로 성경에 기록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바울을 '휼륭한 사람'의 관점으로 바라보시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24절에서, 바울은 사명을 위해 자기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말하죠. 여기서 바울을 인간영웅으로 보는 인본주의 종교인은 이 말씀에서 ‘그래~~ 사명을 감당하려면 내 생명조차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해~~~’라고 해석을 하게 되죠. 과연 성령께서 바라는 것이 그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런 참 용기는 오직 예수님만 가질 수가 있습니다. 지금 24절에서 바울의 표현은 발버둥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발버둥을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사용하신 것이죠. 

 결국 바울은 25절에서 본심을 드러냅니다. 즉, ‘여러분이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것이죠. 그것은 그들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바울 스스로에 대한 걱정도 포함되어 있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26절 보면, 이런 선언이 나오죠.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라고 합니다. 즉, 자신이 걱정에서 벗어났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난 할만큼 했으니 내 책임은 없어’라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과 바울의 차이입니다. 

 이 사도행전20장 바울의 설교는 정말 복잡미묘합니다. 복음을 깨달은 죄인 바울이 자신의 변명을 설교 형식으로 이야기하는 장면이죠. 그래서 정말 많은 갈등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번 포커스를 잘 잡으셔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와 같은 죄입니다. 성경은 영웅을 그려내는 책이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을 매우 잘 포장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결국 바울은 이런 말까지 하죠. 33-34절 보면, 내가 은, 금, 의복을 탐하지도 아니하였고 내 손으로 내가 벌어서 나와 내 동행의 쓸 것을 충당하였다고 합니다. 즉, 난 돈을 탐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거짓말입니다. 바울이 되었던 그 누가 되었던 돈을 탐하지 아니한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 복음을 잘 모르면 이 말을 듣고 ‘아~~ 바울은 정말 휼륭한 사람이구나~~ 나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 종교의 방향성입니다. 

 바울은 지금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를 가기 직전의 두려운 마음을 부여잡고 있는 상태입니다. 성령께서 자신을 몰고 가시기 때문에 가긴 가야겠지만 속으로는 겁나고 두렵죠. 바울은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자기 신념화’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은 자기 신념화가 되면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이기까지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31절에서도 바울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하죠. '밤낮을 쉬지 않았다?' 이것도 과장입니다.

 약간 동화같은 비유를 들어보죠. 만약 하늘에 있는 바울이 이렇게 자신을 험담하는 이 글을 보고 있다면 그는 어떻게 생각을 할까요?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바울이 가장 염려하는 것은 이 땅의 사람들이 자신을 영웅화해서 자신을 '위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이 버려지고 오직 예수님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요한 계시록에 잘 나와있죠. 

 

 "계4:10-11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하늘에 있는 24장로가 자신의 면류관을 다 벗어서 예수님께 드리는 장면입니다. 이 땅에서 나름 복음의 꼭지에 올라서서 주님께 희생과 충성(면류관)을 다한  이들 조차 하늘에 올라가서 복음의 실체인 예수님을 대하면 자신들의 모든 면류관을 벗어서 예수님 발 앞에 드릴 수 밖에 없다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우리는 서로 서로에게 면류관을 씌워주거나 심지어 스스로 면류관을 쓰고자 하죠. 지금 바울도 자신의 면류관을 자랑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인간은 이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포커스가 보이시죠? 우리는 바울의 과장, 확대해석, 자기신념화의 발버둥에 ‘영웅화’ ‘신격화’ 의 프레임을 씌워서 성경을 해석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런 바울의 발버둥을 통해 성령께서 의도하신 것을 잡아내야 합니다. 

 성령께서 의도하신 것은, 바울의 이런 모든 발버둥의 행위는 예수님께서 이미 완성하신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28-30절에서 밝히듯이 내가 떠난 후에 이리가 들어 와 양 떼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하죠. 또 지도자들이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할 것이라고 하죠. 조금 어렵습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오늘 말씀 속 바울이 바로 자신이 말한 주의해야 할 이리입니다. 즉, 성령께서 지금 바울의 설교를 통해 복음을 설명하는데 사용하고 있지만 그 복음을 설명하는 포커스 중에 ‘예수님이 떠난 후 지도자들이 이리의 행태를 보일 것’을 가르치고 있죠. 그런데 지금 바울의 행태가 바로 이 이리의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사도행전이 점점 더 어려워지죠? 사실 복음은 알아갈수록 진짜 어려워집니다. 복음은 결국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것이 전부죠. 그런데 예수님의 정체성은 너무 크고 넓어서 우리가 다 알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하지만 요단강을 건넌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가나안의 1평의 땅을 알아가든, 1000평의 땅을 알아가든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내가 그 분의 가슴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 알면 되죠. 왜냐하면 구원은 나의 ‘앎’이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억(선택)이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억 속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유일한 조건인데 성령께서 그것을 예수님의 지체들에게 알려주는 것이죠. 즉, 믿음은 조건이 아니라 조건이 충족된 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오늘 바울의 설교는 정확하게 구약의 ‘욥기’와 같은 포맷입니다. 욥은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라고 1장에서 선언을 하면서 시작을 하죠. 그러나 세친구와 논쟁을 벌이면서 그는 ‘자신이 의롭다.’는 변명을 계속 합니다. 욥기에서 말하는 ‘욥’은 사실 죄인을 품고 있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죄인과 예수님의 모습이 계속 같이 나오죠. 갈등과 번민, 그리고 율법과 은혜가 계속 함께 나옵니다.(욥기도 홈페이지 상단에 포스팅이 되어있으니 묵상해보세요.)

 오늘의 말씀 속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는 바울의 갈등을 통해 의로운 예수님의 행적을 가르치고 있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지도자가 양들에게 ‘자기 의’를 내세워 양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기(칭찬)’를 희망하는 악한 모습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목사들은 다 여기에 해당이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성령께서 의도하시는 가장 큰 부분은 ‘이런 목사가 되지 말자~~’가 아닙니다. 모든 목사들은 이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양들에게 이것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양들은 목사를  따르지 말라~~~~’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소망이라는 것이 포커스입니다. 너무 어렵죠? 이렇게 어려운 이유가 바로 말씀을 '행위'로 읽기 때문입니다. 행위의 포커스로 오늘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도대체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믿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의 굴레에 갇히게 됩니다. 

 

 다시 조금 쉬운 예를 들어볼께요. 10평짜리 하얀 방이 있다고 해보죠. 주인이 자신의 하인에게 그 방에 들어가서 어떤 것도 남기지 말고 깨끗하게 청소하라고 명령했다고 해볼께요. 그 하인이 완벽하게 청소를 했다고 해보죠. 그러나 그 하인은 잘못알고 있죠? 그 하인이 그 방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눈을 뜬다는 것은 바로 이 방 안에 내가 남아있기 때문에 '어떤 것도 남기지 말고'라는 주인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방 안의 가장 큰 쓰레기는 바로 '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정말 정말 어렵습니다. 불가능하죠. 또한 이 방은 문이 없어서 내가 나갈 수도 없는 방입니다. 결국 이 방에서 가장 큰 쓰레기는 '나'이며 내가 나를 청소하여 밖으로 내보낼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래서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바라는 것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방을 천지창조 혹은 인류역사의 방이라고 합니다. 그 안에서 내가 청소라는 행위를 했던 공간과 시간을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계획한 주님의 목적은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도록 만드는 것이죠. 이게 복음의 전부입니다. 이 시각을 갖도록 하는 것, 이렇게 눈을 뜨는 것, 이렇게 방향을 돌려 놓는 것이 바로 복음의 전부입니다. 우리의 눈을 오직 예수님께로만 향하게 만들어 놓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계획이죠. 

 

 바울도 지금 자신이 복음을 위해 열심히 청소했다고 나불 나불 대는 모습으로 나오지만 결국 그도 자신이 가장 큰 쓰레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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