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21:1-15(22.10.12.수)

은혜바라기 2022. 10. 12. 08:46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성령께서는 20장 바울의 설교를 통해 성경은 절대 인물(바울)에게 포커스를 맞추면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결국 지금의 지도자들 혹은 교회의 제도에 포커스를 맞추지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지도자들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지면 어떠한 형태의 모습이 드러나는지를 오늘 묵상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4절에 보면,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게 됩니다. 성령의 감동이란 정확하게 복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의 진로, 복음의 방향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결박과 고난을 당하는 것이 바로 복음의 진로, 복음의 방향성입니다.(20장 바울의 설교에서 나왔죠.) 

 그런데 그들은 반대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악’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어린아이와 가축까지 다 죽이라’고 명하실 때 ‘어찌 인간이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을 행하신다’라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 선이다.’입니다. 이 두 문장의 차이가 뭘까요? 바로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선을 행하신다.'라는 말은 내가 생각하는 '선', 혹은 인류가 생각하는 보편타당한 '선'이 먼저 존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온전하게 지키신다는 생각입니다. 즉, 나의 기준, 인류의 기준이 하나님보다 앞선 것이죠. 이것을 '악'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 선'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최우선, 혹은 기준이라는 말입니다. 

 어제부터 사도행전은 더 어려워졌죠? 잘 따라오셔야 합니다. 오늘의 묵상에서도 성령께서 강조하고 싶으신 것이 무엇인지 맥락을 잘 잡으셔야 합니다. 지금 성령께서는 참선과 참악의 개념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장에서 바울은 ‘자기 의’를 드러낸 이리의 모습을 한 지도자의 형태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인간적인 휼륭함에 휩쓸린 제자들이 성령님의 의도와 반대의 길을 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만약 이들의 인간적인 권유로 인해서 바울이 예루살렘과 로마를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바울은 조금 편한 삶을 살았겠죠. 그러나 성경은 완성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7절 이후의 에피소드를 볼까요? 빌립이라는 사람의 네 딸이 예언자로 나오고 또 다른 이 예언자인 아가보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고 예언합니다. 바울이 머문 곳도 예언자 4명이 존재하고 그곳으로 다른 예언자도 오게 되고 그 예언자는 퍼포먼스까지 보여주죠. 성경에서 계속 '예언'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결박과 박해를 당해야 한다는 것이 성령님의 의도라는 것을 확증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영적 전쟁, 즉 치열한 진리 싸움이 보이십니까? 인본주의에서 누구나 알 수 있는 '선과 악'을 비교해서 복음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나 인본주의에서 바라보는 '선'하다는 기준을 '악'으로 삼아 복음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은 정말 쉽지않죠?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12절, 이 예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하죠. 아까 두로에서 바울의 행로를 막은 제자들의 에피소드와 똑같은 인간적인 이유로 또 다시 성령님의 계시를 거역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일 때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인본주의적 선과 악을 통해 선, 악의 개념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 더 성숙한 상태가 되면 우리가 알고 있었던 '선과 악'을 결정하는 그 기준 자체가 악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선의 개념을 완벽하게 붕괴시켜 버리시죠. 

 이 부분이 바로 베드로와 고넬료 에피소드입니다. 그 에피소드에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들을 먹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선하다고 하는 것을 네가 악하다고 하느냐?'라고 말씀하시죠.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아시겠죠? 성경과 인생은 마지막까지 이 싸움입니다. 즉,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시점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싸움인 것입니다. 이것을 진리 전쟁 곧 아마겟돈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는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분리되어 죽은 자가 된 이후부터 줄 곧 우리를 위해서 이 싸움을 하고 계신 것이죠. 조금 다른 말로 하면, '다시 내게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 대신 홀로 이것을 하신 것입니다. 

 정신차린 바울은 이때 13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합니다. 그리고 ‘난 결박당하고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바울은 정확하게 성령님의 의도대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죠. 

 사실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는 죄인이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기준이 하나님에게로부터 나에게로 바뀐 것을 죄라고 합니다. 즉, 나의 판단으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이죠. 이때부터 선과 악, 즉 이로움과 해로움은 오직 인간 스스로의 기준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것을 인본주의라고 하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 까지 이 인본주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 인본주의 자체가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외부의 힘인 성령께서 오셔서 선택된 자들의 눈을 뜨게 하면 그때서야 비로소 인본주의 실체를 알게 되죠. 그 인본주의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눈을 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장 많이 행하신 기적이 바로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이었습니다. 만약 기적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즉 기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더 어메이징한 기적을 더 많이 사용하셨었겠죠.  그러나 예수님의 기적의 목적은 바로 '알려줌'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가장 많이 사용한 그 눈을 뜨게 한 기적은 총 7번이었죠. 7은 천국의 숫자입니다. 즉, 눈을 떠야 천국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성경이라는 큰 강물이 어떤 흐름으로 흘러가는지 눈을 뜨고 읽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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