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완료)

계3:1-3(24.07.19.금)

은혜바라기 2024. 7. 19. 08:02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 반복 서론 : 일곱 교회는 일곱 개의 각기 다른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7이라는 숫자는 복음에서 ‘완전함’을 의미하므로 ‘완전하게 구원받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즉, 일곱 교회는 ‘구원받은 나’입니다. 고로 각각의 교회마다 칭찬과 책망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땅에 있는 동안 겪게 되는 모든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열심히 나를 구원하신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이 방향성을 잃지 마시고 묵상하세요. ))

 사데 교회 상황도 내가 이 땅에서 겪게 될 상황들입니다. 

 1절,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가장 먼저 나오죠. 모든 교회마다 그냥 편하게 ‘예수님이 편지하기를...’ 이라고 안하고 왜 계속 여러가지 예수님의 정체성으로 예수님을 설명할까요? 이것이 믿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감정의 요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이 한 구절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절대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 ‘나는 부처를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부처라는 자리에 예수라는 단어만 바꿔놓을 것이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께서 선택받은 자들에게 오셔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려주셔서 그 분의 정체성을 하나 둘 씩 계속적으로 알려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일곱 교회 마다 계속 예수님의 정체성을 성령(교회의 사자=성령)께서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온 예수님의 정체성은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라고 나오죠. 일곱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숫자 7은 일곱개라는 갯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즉, 일곱 영은 영이 일곱 개라는 뜻이 아니라 ‘완전한 영’ 즉,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일곱 별은 완전한 교회를 의미합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중요한 상징이죠. 그리고 그 태양의 빛을 받을 때에만 빛을 반사하는 달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달이 빛이 어떻게(how)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별은 빛이 얼마나(how many)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죠. 그래서 밤 하늘의 수 많은 별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님과 함께 교회를 품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1절 하반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 땅의 모든 존재는 다 영적으로 ‘죽은 자’입니다. 언제 그렇게 되었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기준을 버린 날, 즉 선악과 에피소드가 벌어진 그 날이죠.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죄인(죽은 자)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고로 선악과 에피소드는 영적으로 살아 있던 인간이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기준을 버리고 인간의 기준으로만 살게 되는데 이것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인간은 평생 인본주의에 묶여 포로처럼 살게 되죠. 인간은 이렇게 살면서 ‘나는 살아있다. 살아간다.’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모든 인간을 향하여 ‘너희들은 죽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2절은 번역도 어렵게 해 놓았지만 해석도 어렵습니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조금 쉬운 번역으로 풀면, ‘깨어나라~~ 그래서 거의 죽게 된 너를 살펴라~~’입니다. 

 하지만 해석은 더 어렵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거의 죽게 된 상태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2절 후반절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고 하신 것이죠. 그런데 ‘거의 죽게 되었다’ 라고 표현한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결국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게 되는 첫 단계가 ‘깨어라~~’입니다. 이 말씀이 명령처럼 보이죠? 아닙니다. 이 말씀을 명령처럼 쓰신 이유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죽은 자인데 명령을 받아서 ‘스스로 깨어라~~’는 것은 모순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은 그것이 선언되어지는 순간 이미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렇게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신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3절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가 전에 들었던 말씀에서 복음을 생각나게 하여 예수님만 소망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령께서 깨우지 아니하면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예수님을 알 수 없다는 의미로 ‘예수님이 도둑같이 와도 너는 모른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P.S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 되어 있습니다.
** 핸드폰에서는 첫 화면 중간에 보시면 “분류 전체 보기”를 보시면 됩니다. 
**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참 복음을 단 한 사람이라도 같이 고민하고 대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 한 분이라도 그런 분이 곁에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런 분께 이 묵상을 전해주시고 함께 고민하세요.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들만 그 분의 음성(복음)을 듣게 됩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삶에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버립니다.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묵상을 함께 나누십시오.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함께 할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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