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인 중 하나를 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일곱’은 ‘갯수’가 아닙니다. 일곱은 복음적 완전수입니다. 그래서 ‘일곱 인’이란 완전하게 은닉된 복음, 혹은 은닉된 완전한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고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감추어져 있던 복음을 선택받은 자들에게 드러내서 가르쳐 주신다고 해석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일곱 인 중 하나를 떼시고, 이후 차례차례 일곱 인을 계속 떼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간적 순서로 풀어서 설명해 주시는 것 뿐이고 실제로는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 비유들은 선택받은 자들의 인생 내내 순서없이 다가오는 고난을 가리킵니다.
즉, 숨겨져 있는(인:은닉성), 강하게 전달되는(나팔:전달성), 준비되어 있는(대접:준비성) 이 3가지 큰 속성을 가진 복음을 예수님께서 선택받은 자들에게 가르치는데 그 외적인 형태가 고난의 형태로 따라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전달하는 과정은 선택받은 자들의 옛 자아를 인본주의에서 분리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결 혹은 성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고난을 통해 고행, 훈련, 수련을 쌓아서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방향성이 가장 위험합니다. 이것은 오히려 ‘종교화’가 되는 방향성입니다. 이런 방향성은 불교의 수행, 이슬람의 희생, 힌두교의 고행과 같이 기독교인의 바리새인화가 되는 것뿐입니다.
즉, 복음을 알아간다는 것은 더 훌륭한 종교인지 되자~~ 의 방향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나는 오직 죄인일 뿐, 나의 무가치, 무능력을 깨닫게 되어 오직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온전하게 다 이루셨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방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 올바른 방향성입니다.
코끼리를 설명할 때 어쩔 수 없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코를 설명하고, 귀를 설명하고, 다리를 설명하지만 실제 코끼리는 같은 시간 속에서 코, 귀, 다리가 함께 존재하는 것 처럼 요한 계시록도 시간과 역사 순서대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난 형태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코끼리의 부위를 시간 순서대로 설명하듯 나열한 것 뿐이죠.
‘네 생물’에서 ‘4’는 동서남북, 즉 온 우주, 온 세상, 모든 역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생물로 표현된 이유는 모든 역사가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복음을 가르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자와 같은 두려움의 역사, 송아지와 같은 도움의 역사, 사람과 같은 인본주의 역사, 독수리와 같은 구원의 역사 총 4가지 속성의 역사가 혼합되여 끊임없이 인류 역사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속성을 가진 복음은 ‘우렛소리’같다고 나옵니다. 즉,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분명하고 강한 메시지의 속성으로 복음이 전달된다는 의미입니다. 고난은 유기된 자들에게 고통으로만 다가 오지만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도록 하는 매개체가 되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