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13장을 보면, 용(사탄)이 나오고 그 사탄에게 권세를 받은 두 짐승이 나옵니다. 그리고 두 짐승의 정체는 ‘구체화된 인본주의’입니다. 인본주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인본주의 바벨탑을 쌓죠. 이 바벨탑을 크게 나누면 재물(돈), 권력(인기), 종교 3층으로 되어 있고 인간은 항상 그 최고 꼭대기를 차지 하려고 노력하고 경쟁합니다.
인본주의가 하나님 처럼 되려고 하는 모습을 숫자로 표현하면 ‘666’이 됩니다. 인본주의 숫자 ‘6’이 하나님의 숫자인 ‘3’을 흉내 낸다고 하여 6을 세 번 표시하여 ‘666’으로 표현한 것이죠. 그런데 이 666은 유기된 자들(버림받는 자들)의 오른 손이나 이마에 그 표를 받게 된다고 나옵니다. 오른 손은 ‘능력’을 상징하므로 인본주의 능력을 쌓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마에 표를 받는 것은 나의 생각이 인본주의에 붙들려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14장 1절을 보면, 예수님 옆에 144,000명이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써져 있다고 나옵니다. 이것도 방향은 반대지만 같은 방식으로 해석이 됩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144,000명인가? 이것은 구약의 12지파 + 신약의 12제자를 곱한 수에 완전수 1,000을 곱한 것입니다. 구약의 12지파+신약의 12제자의 의미는 구약과 신약에서 선택받은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참교회를 의미하죠. 지금 우리가 다니는 지역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안에서 실제로 구원받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14장1절은 완성된 천국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묵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묵시 속에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이 된 상태입니다. ‘묵시’를 조금 쉽게 설명을 하면, 나의 부모님께서 내 공부방을 아름답게 잘 꾸며놓았다고 해보죠. 하지만 조명을 끈 상태이기 때문에 그 공부방에 들어온 나는 그 방의 상태를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이때 나는 ‘내 아름다운 공부방’을 상상 할 수 있지만 방의 진짜 상태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불을 켜면 그 아름다운 공부방은 분명히 존재하죠. 이것이 ‘묵시’입니다. 이때 이 빛의 역할을 예수 그리스도가 하게 됩니다. 요한은 잠시 불 꺼진 방의 불을 켜고 그것을 잠시 들여다 본 것입니다.
2절에 나온 모든 단어들은 전부 ‘복음의 속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은 복음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물 소리 같다’라는 것은 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우렛소리 같다’는 것은 선택받은 자들이라면 복음이 반드시 들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다’라는 것은 복음이 주는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3절 하반절을 보면,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라고 나옵니다. 구원받을 자들은 이미 예정되어 있고 그 밖에 사람은 절대 복음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144,000이라는 숫자는 선택받은 사람들의 정확한 사람숫자가 아니라 상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144,000이라고 정수로 표현한 이유는 구원받을 사람은 ‘정해져 있다.’라는 속성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복음이라는 노래를 배울 수 있는 사람, 즉 선택받은 자들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종교와 행위에 붙잡힌 자들에게 유치원생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복음을 설명해도 결국 그들은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로 되묻습니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죠. 복음은 내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부인되고 오직 예수님만 소망되는 것이죠. 교회의 대표인 예수님의 품에 들어가 공짜로 예수님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어야 그 다음 4절-5절이 이해가 됩니다.
4-5절은 ‘나를 기준’하면 절대 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4-5절은 144,000명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내용을 보면 그들은 순결하고, 처음 익은 열매이며,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하죠. 이 내용을 잘 보세요. 이 내용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선하고 거룩한 성품은 완전하게 타락한 나를 표현한 이야기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나를 본인과 동일하게 표현해 주시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이 나에게 복된 소식, 즉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순결하고, 거짓없고, 흠이 없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여 그 분에 품에 들어 있을 때 그런 칭호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왜 '믿음'이라는 것이 내가 노력해서 유지해야 하는 감정이 아닌지 아셨죠? 믿음은 성령께서 선택받은 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계속 설명해 주시면 그들 안에서 저절로 확장되는 증상일 뿐입니다. 고로 믿음의 출처는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