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이르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일곱은 복음적 완전수입니다. 성경은 7명의 천사가 각각 일곱 대접을 쏟는 장면으로 표현되었지만 이것은 이런 순서대로 재앙이 임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7명의 천사는 그냥 모두 ‘완전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순서대로 설명하신 이유는 우리가 쉽게 알아듣도록 설명하시는 것 뿐입니다.
대접은 ‘이미 담겨져 준비가 되어 있음’이라는 속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대접은 ‘완전하게 준비됨’을 의미합니다.
첫 대접에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게 됩니다.
짐승의 표는 ‘인본주의에 묶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인본주의를 크게 나누면 돈, 권력(인기), 종교가 존재하고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경쟁하듯 이 세 가지 가치를 쫓습니다. 이 세 가지는 예수님의 광야 3시험과도 일치하죠.
이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난다고 하죠. 이것은 고난 중에서도 매우 직접적인 고난을 의미합니다. 사탄이 욥을 시험할 때 첫 번째는 욥의 주변 사람과 환경을 통해 고난을 주었지만 두 번째 고난은 욥의 몸에 직접적인 고통을 주었던 것과 같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은 유기된 자(심판받는 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받은 자들의 옛 자아에 더 큰 초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기된 자에게 단 1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둘째 대접은 바다가 죽은 자의 피와 같이 되고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는다고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을 기억하십니까? 바다는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역사에 휘몰아치면서 생기는 매우 험난한 인생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40년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1세대 60만명이 모두 죽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예수)와 갈렙(교회)만 가나안(천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죽은 1세대 60만명은 선택받은 자들의 옛 자아를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도 바다의 모든 생물이 죽는다고 설명을 하고 있죠.
선택받은 자들은 이 땅에 살면서 자신의 옛 자아가 모두 죽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옛 자아를 죽이는 방법은 노력과 훈련이 아닙니다. 이런 방법은 불교의 수행, 이슬람의 순교, 힌두교의 고행과 같은 종교적 방법일 뿐입니다. 참 기독교가 옛 자아를 죽이는 방법은 옛 자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만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 뿐입니다.
셋째 대접도 둘째 대접과 비슷하게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된다고 나오죠. 둘째와 셋째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나온 ‘피’는 심판의 피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선택받은 자들이 실제 흘려야 할 피는 예수님께서 대신 흘리셨죠. 그래서 이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조금 어려워집니다. 잘 듣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여자(교회)가 남자(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면은 자주 우물가에서 이루어지죠. 물은 청결(심판)하게 해주고 생명(구원)을 유지시켜 주는 속성이 있죠. 그런 물이 흐르는 강과 물 근원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대접을 쏟으니 ‘피’가 된다고 하죠. 즉, 근원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의 방향에서 해석하면 모든 인간이 피 흘린다는 것, 즉 심판받는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간이 죄인이 되면서 인간 뿐 아니라 이 땅(세상)은 저주받았다고 나옵니다. 즉, 인간과 이 세상은 모두 저주받아 죽은 자가 된 것이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죠. 성경은 실제로 십자가를 ‘저주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나의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가셔서 십자가에서 실제 저주받아 죽으신 것입니다.
“신명기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런데 저주 받은 자의 저주는 다른 자가 짊어지면 그 저주가 풀리게 됩니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문둥병이 다 치료되어 드리는 제사를 보면, 새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를 죽여 그 피를 다른 새에게 뿌리고 그 피가 묻은 새를 자유롭게 놓아줍니다. 감격스럽죠? 다른 새에게 피를 뿌려 주고 죽은 새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피를 뒤집어 쓰고 저주에서 풀려나 구원을 얻은 새가 ‘나’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소망하는 것 뿐이 없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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