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진행중)

마가복음2:13-14(25.01.13.월)

은혜바라기 2025. 1. 13. 08:05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3절도 단순한 배경설명같아 보이지만 이 구절도 배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에 대한 세심한 설명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물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물이 모이는 곳에서 예수님과 교회가 만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것이죠. 이삭과 야곱의 아내도 우물에서 처음 발견되었죠. 또한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의 비유에서도 그녀가 예수님을 만난 곳이 우물이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에덴동산에서 큰 4줄기 강물 나와서 땅으로 흘러간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를 감싸 흐르면서 끌고 간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표면적으로는 인류의 역사만 흐르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함께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역사가 함께 모여 흐르고 모이는 곳을 ‘바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다’는 역사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 안에는 인류의 저주의 역사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함께 있죠. 그래서 바다는 구원와 멸망이 함께 있는 심판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 보면 천국은 이 바다가 유리바다와 같다고 나옵니다. 즉, 인류의 저주의 역사는 없어지고 오직 깨끗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3절도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나가시매’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함께 있는 심판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매~~ 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큰 무리, 즉 교회를 복음으로 가르친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가르친 것과 지금 바다가에서 무리들에게 복음을 가르친 것은 모두 같은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 큰 무리가 다 구원을 받았는가? 아닌가? 는 초점이 아니라고 계속 말씀드렸죠? 초점은 지금 이 글을 읽은 우리에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당시 그 큰 무리를 이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후 14절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다고 나옵니다. 레위를 소개할 때 2개의 정체성이 나옵니다. 첫째 알패오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혈육의 아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인본주의에 묶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두 번째로 이 자의 이름이 ‘레위’입니다. 레위지파는 구별된 지파죠. 레위지파는 절대 개인 재산을 가질 수 없고 종교적 봉사만 담당하는 구별된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세관’ 즉, 오직 돈만을 위해 일을 하는 직업군에 속해 있는 장면을 예수님께서 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레위의 상황을 통해 현재 우리의 상태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인본주의에 빠져 오직 돈만을 추구하며 살고 있죠. 하지만 우리의 원래 정체성은 선택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 함정을 절대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께서 나에게 찾아 오셔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면 그것이 바로 인본주의와 분리가 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분리는 심판이자 구원인 것입니다. 

 14절 후반절을 보면 레위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인과율에 중독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장면을 보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갑자기 처음 본 사람이 세무서에 와서 일하고 있는 9급 세무 공무원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는데 다 버리고 아무 소리도 없이 일어나 따른다면 비정상이죠.

 그래서 성경은 인본주의 인과율과 논리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많은 성경 주석을 보면 이때 레위의 상황과 예수님의 상황을 그럴듯하게 엮어서 스토리를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그런 누룩에 절대 귀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세심한 스토리가 복음을 설명하는 것에 필요했다면 예수님께서는 필요 이상으로 그 배경 이유를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냥 ‘나를 따르라’ 하니 ‘일어나 따르니라’가 끝이죠. 그렇다면 이 이상의 복음적 설명은 필요없다는 의미고 심지어 이런 단순한 상황자체가 복음을 더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고로 오늘 묵상의 핵심은 구원은 나의 기준, 나의 선택, 나의 의지~~ 그 어떤 것도 필요없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이 전부라는 뜻입니다. 그 전의 나의 상태는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레위(구별된 자)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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