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진행중)

마가복음2:6-12(25.01.10.금)

은혜바라기 2025. 1. 10. 08:03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오늘 말씀은 직전 묵상 ‘중풍병자 에피소드’와 연결된 묵상입니다. 그래서 직전 묵상의 핵심을 잠시 요약합니다. 

 ‘중풍병자’는 인본주의에 묶여 영적으로 마비된 우리의 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죄인 된 우리를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견인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성령님의 선택과 섭리를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본문에서는 이런 성령님의 선택과 섭리를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믿음은 우리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출처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를 낫게 하시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이 마지막 발언을 두고 예수님께 시비를 건 서기관들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유독 많이 나오죠. 이 자들을 현대의 용어로 바꾸면 바리새인은 목사라고 할 수 있고 서기관은 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입니다. 

 6-7절을 성경에 기록한 이유는 ‘신학자가 오히려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른다’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이런 상황을 만드신 것은  그 상황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 신앙생활을 잘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런 상황이 반드시 역사 내내 계속 발생한다는 의미입니다. 현대의 신학교는 거의 대부분 인본주의 종교로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지만 그런 것을 설명하는 시간조차 너무 아까워서 생략합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예수님의 4복음서를 한 장이라도 더 읽고 하루 내내 깊은 묵상을 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오늘도 7절을 보면, 서기관은 예수님께 “어떻게 하나님만 용서할 수 있는 죄를 네(예수님)가 용서하는가? 라는 취지로 말하면서 예수님이 신성모독한다고 비판하고 있죠. 

 예수님의 가장 큰 주요 정체성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것인데 서기관은 이런 예수님의 가장 큰 주요 정체성조차 모르고 있죠. 사실 신학을 연구한다는 말 자체도 개미들 끼리 모여 사람을 연구하자는 말 보다 더 웃긴 코미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신학조차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하시죠. 이렇게 ‘모든 것을 도구로 사용하여 복음을 설명한다’ 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9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9절을 다시 한 번 보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입니다. 번역이 조금 헤깔릴 수 있어서 설명을 해드릴께요. 

 제가 늘 말씀드렸지만 성경은 유기된 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당시 에피소드에 나오는 등장인물에게 가르치려는 것도 초점이 아닙니다. 항상 지금 이 글을 읽은 선택받은 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 초점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나인) 너에게 그냥 중풍병자를 고쳤다고만 설명할 수 있지만 나(예수님)의 정체성을 너에게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바꾸어서 말한 것이란다~~’입니다. 이해가 쉽죠? 심지어 이렇게 말하고 있는 취지까지도 10절에서 정확하게 다시 설명하고 있죠. 

 성경은 복음의 눈으로 보면 매우 쉽습니다. 복음은 매우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옛 자아의 눈이 항상 인본주의를 쫓기 때문에 복음을 보다가도 ‘인본주의 종교’의 함정에 빠져버립니다. 쉽게 예를 들면, 폭이 1미터나 되는 길을 걷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천 길 낭떠러지 위에 있는 1미터 외길이라면 두려움 때문에 잘 걷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길을 보지 않고 그 아래 낭떠러지를 보기 때문이죠.  

 마지막으로 오늘 에피소드에서 유심히 보아야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상’입니다. 오늘 에피소드의 결론격인 11-12절을 보면, 두 번이나 ‘상’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두 번 반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강조법입니다. 그래서 무심히 넘어가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그냥 일어나 가라~~ 라고 하지 않고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고 하시죠. 그러자 12절에서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굳이 ‘상’을 강조했을까요? 

 이 ‘상’은 중풍병자가 누웠던 상입니다. 즉, 이 사람이 원래는 병자였다는 정체성을 가리키는 증거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증거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의미는 전도지를 들고 길에 나가 전달하라는 것도 아니고 옆집 사람을 잘 꼬셔서 교회에 데리고 오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 의미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나를 통해 나에게 증거하여 내가 알고있느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알게 된다고 해도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죄인의 삶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그것을 잃어버리죠. 스스로 훌륭한 크리스찬이 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참 정체성인 ‘죄인’을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이 ‘죄인을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인 죄인을 알게 해주는 ‘상’을 가지고 인생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두 번 반복해 강조하시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P.S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 되어 있습니다.
** 핸드폰에서는 첫 화면 중간에 보시면 “분류 전체 보기”를 보시면 됩니다. 
**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참 복음을 단 한 사람이라도 같이 고민하고 대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 한 분이라도 그런 분이 곁에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런 분께 이 묵상을 전해주시고 함께 고민하세요.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들만 그 분의 음성(복음)을 듣게 됩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삶에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길을 잃어버린 양이기 때문입니다.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묵상을 함께 나누십시오.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함께 할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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