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구약의 모든 율법, 제사, 규례는 전부 복음의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나병환자’에 대한 율법도 우리가 매우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보면 나병은 제사장이 판단합니다. 제사장은 나병이라고 판단된 사람을 ‘부정하다’라고 선언하고 마을과 분리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나병이 온 몸에 다 퍼지면 ‘정하다’라고 선언하도록 되어 있죠. 이상하죠?
나병은 통증 없이 온 몸이 썩어가는 병입니다. 통증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썩어 가는 상황에서도 상대적으로 심각성을 잘 못느끼죠. 이런 나병의 속성이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우리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아담)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인본주의를 선택했죠.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살인, 간음, 절도, 거짓말 등은 죄가 아니라 죄의 증상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죄의 본질인 인본주의 가치에 취하여 그 가치만을 따르며 살죠.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죄(인본주의)가 나를 좀 먹고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심각성을 외면한 채 살아갑니다. 그것을 ‘나병’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나병은 특별하게 ‘율법적 취급’으로 다룬 것입니다.
그래서 나병이 걸리면 부정하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우리가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그 상태가 부정하다, 즉 죄인이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나병걸린 자를 분리해야 한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나병이 온몸에 다 퍼지면 역설적이게도 ‘정하다’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본주의에 묶여 죄인의 삶을 살아도 자신이 죄인인지 모르다가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면 우리의 죄를 보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절대부패한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을 알게 되죠. 그런데 이 상태를 인식하는 증상이 선택받은 자들의 증상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된 상태를 인식하면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알게 되죠. 그때부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합니다. 그래서 온 몸에 나병이 다 퍼진 절대부패한 상태를 아는 것이 예수님의 필요성을 부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 상태가 정한 상태, 즉 의롭게 여겨진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더 복음적으로 감동되는 것은 나병이 온전히 치료된 자들의 제사 과정입니다. 나병이 치료된 자들이 새 두 마리를 제사장에게 가져가면 한 마리를 죽여 그 피를 다른 새에게 뿌리고 공중에 자유롭게 풀어줍니다. 여기서 죽여서 피를 내는 새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피를 뿌려서 구원을 얻어 공중(천국)으로 날아간 새가 우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예수님도 구약의 나병환자 율법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오늘 등장한 나병환자는 예수님에 의해서 깨끗함을 얻었죠. 이것은 구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 사람이 참 구원을 얻었는가? 아닌가?는 초점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구원을 얻었을 수도 있고 단지 도구로 사용된 후 버려질 수도 있습니다. 초점은 이 사람을 통해 지금 여러분에게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병환자는 자신이 나병에 걸린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이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서 많은 사람이 ‘나는 죄인입니다.’를 고백하지만 대부분 죄인 코스프레입니다. (이 부분은 내용이 길기 때문에 나중에 따로 묵상하죠.)
이후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라고 나옵니다. 이것이 구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신 것, 즉 나를 선택하여 사랑의 대상, 긍휼의 대상으로 삼으신 것이 구원의 핵심이죠. 그러면 이후 그 사람은 깨끗하게 됩니다.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중 경고하시고 단지 구약의 율법에 나온 제사 과정을 시행하라고 하십니다. 왜 알리지 말라고 했을까요? 십자가 이전에 기적으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기적과 이적으로 생긴 믿음은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이렇게 기적과 이적으로 생긴 믿음을 매우 경계하셨죠. 오직 구원은 십자가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바보같은 이 놈은 나가서 이 일을 널리 퍼지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방에서 예수님을 보려고 사람이 몰려왔죠. 현대에 이런 상황이 교회에서 벌어진다면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좋아하겠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피하시고 오히려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다고 나옵니다. 우리와 완전히 반대로 행동하시죠?
교회에 다니다 보면 기도로 가족의 병이 나아서 믿음을 가지게 되고 그 때부터 열렬한 크리스찬이 되는 사람들이 다소 있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때 가지게 된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참 복음을 이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사람이 이런 헛된 믿음의 과정은 그 경험을 한 이후 참 믿음을 가르치려는 성령님의 '신비'라는 계획 속에 들어 있을 수는 있습니다.
바울도 회심 이전에는 크리스찬을 색출해서 죽이는 임무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이런 경험을 거치게 한 이유가 분명이 있었겠죠. 하지만 바울이 했으므로 크리스찬을 죽였던 그 과거의 결정 마저 복음적이다~~ 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 성령님의 '신비'의 섭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과정 자체를 재판관처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판단은 오직 복음적인인가? 예 예, 복음적이 아닌가? 아니오, 아니오 할 뿐입니다.
“마태복음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끝
'마가복음(진행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2:6-12(25.01.10.금) (1) | 2025.01.10 |
---|---|
마가복음2:1-5(25.01.09.목) (1) | 2025.01.09 |
마가복음1:36-39(25.01.07.화) (2) | 2025.01.07 |
마가복음1:35(25.01.06.월) (1) | 2025.01.06 |
마가복음1:32-34(25.01.03.금) (2) | 2025.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