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완료)

약4:9-10(22.04.20.수)

은혜바라기 2022. 4. 20. 08:25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오늘 9절 말씀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8복의 내용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 마5:3-4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마5장 8복의 말씀은 번역 순서가 잘못 되었습니다. 원어는 복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즉,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 이런 순서죠.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은 바로 ‘복음’입니다. 고로 이 말씀은 ‘복음에 눈을 뜬 자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천국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옛 자아에 묶여 있을 때에는 이 세상의 가치가 내 마음에 꽉 차 있는 마음이 부유한 상태입니다. 이 세상이 추구하는 돈, 인기, 명예, 권력, 학식, 인격, 인간관계 등등을 마음에 품고 열심히 쫓고 있는 나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그런데 복음을 알게 되면(복 있는 자가 되면) 그 가치가 다 무너져서 그 마음에 있었던 인본주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심령이 텅 비어 있다는 것, 즉 진리로 채워져야 할 공간이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된다는 것이죠. 

 

 이후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애통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첫걸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반대로 이 세상의 행복을 찾기 바라죠. 즉, 예수님을 통해서 내 마음 속에 쌓여 있는 인본주의 가치가 현실로 실현되기를 바라죠. (심지어 예수님께 기도하고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다고 좋아하고 간증하는 교인들이 태반입니다.- 이미 기독교가 아닙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인본주의 가치를 잃어 버리고 애통하고 슬퍼하고 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향성을 잘 잡으셔야합니다. 인본주의 가치인 '돈'을 잃어버려서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인본주의 가치인 '돈'이 '가치없음'을 알아버려 마음(심령)이 원하는 바(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 이렇게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죠. 이때의 위로는 진정한 위로인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의 위로는 반대로 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자에게 '그래도 너는 아직 건강하잖니~'라고 말하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건강의 가치'를 일깨워 주고, 대학에 떨어진 자녀에게 '그래도 너는 그 동안 최선을 다 했잖니~'라고 말하면서 '최선의 행위를 했음'이라는 가치를 일깨워 주죠. 이렇게 우리는 어떤 사람이 슬퍼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의 다른 가치를 일깨워 주는 것으로 위로를 합니다. 그려면 실제로 그 사람은 위로를 받게 됩니다. 심지어 사람은 1억을 사기 당하고 낙담할 때 옆집 사람이 10억을 사기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를 받습니다. 나는 그 사람에 비해 9억의 가치를 보존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는 것이죠. 자신의 자녀가 교통사고가 나서 팔이 부러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낙담이 되죠. 그런데 같이 타고 갔던 친구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듣게 되면 오히려 팔만 다친 것이 '위로'가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민낯입니다. 

 

 그러나 복음에서 말하는 위로는 이것과 전혀 다른 방향성입니다. 마음 속에서 인본주의 가치가 모두 무너져버려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어져 버린 상태를 말하죠. 어떤 경우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고 나서야 그런 삶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경우도 종종 있죠. (이 때 대부분은 우울증을 앓게 되죠. 그러나 곧 또 다른 가치를 찾아 갑니다. 그래서 '우울증'이 치료되었다고 착각하죠.) 하지만 태초에 예수님의 신부로 예정이 되어 있는 자들은 이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알게 되죠. 그 때서야 진정한 위로를 받게 됩니다. 천지만물이, 모든 역사가, 모든 인생이 바로 복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설명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죠. 그 때 부터 전혀 다른 삶의 방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본인이 복음을 알게 되었는가? 아닌가? 의 판단은 바로 '만약 예수님이 안 계신다면 내 삶은 어떠한가?'를 상상해 보시면 됩니다. 이 질문의 답이 '삶은 의미없음'으로 결론이 나는 분들은 정확하게 복음의 진영에 계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의 답이 '그래도 다른 삶을 찾아 열심히 살아야지~~'로 결론이 나는 분들은 정말 기도 많이 하셔야 합니다. ))

 

 심지어 9절 마지막에 보면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까지 하시죠. 굳이 즐거움 조차 근심을 바꾸라는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정도로 이 세상 인본주의가 주는 가치는 매우 치명적인 독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의 가치를 모두 상실하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설명하신 후 10절에서 ‘주 앞에서 낮추라’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이 두 가지 말씀은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를 쌓아가며 인본주의 바벨탑을 한계단씩 올라가려고 하죠.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이 바벨탑의 가치를 상실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벨탑 자체를 무너뜨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낮추는 것’입니다.( 나(인본주의)의 가치 붕괴 = 나의 낮아짐 )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높이신다고 하죠. 그런데 이 말씀은 조금 더 깊이 묵상해야만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까지만 깨닫고 이 나를 낮추는 것을 노력하는 방향성을 갖게 되면 그것을 '종교'라고 합니다. 불교의 해탈, 무소유와 같은 방향성을 갖게 되는 것이죠. )

 그러나 참 기독교는 주 앞에서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자는 오직 예수님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나 그 분은 그 자신을 다 비우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죠. 완벽하게 자신을 낮추신 유일한 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예수님만 높이신 것입니다. 오직 천국은 예수님만 갈 수 있는 곳이 된 것이죠. 유일하게 하나님의 우편에 예수님만 설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런 예수님의 품에 내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사실을 성령께 듣게 되죠. 이 소식을 복된 소식(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앞에서 낮추는 방법’ 은 오직 예수님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 뿐입니다.(이것이 세상 종교, 즉 인본주의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 즉, 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뒤로 숨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시고 그 등 뒤에 숨어 있는 나 까지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수님과 내가 한몸이라는 원리를 잊게 되면 절대 해석이 안됩니다. 이 ‘한 몸 원리'가 붕괴되고 내가 스스로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곁에서 벗어나 ‘분리된 나’가 되는 것이죠. 이 모습이 정확하게 선악과 에피소드에서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우리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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