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완료)

약4:13-17(22.04.22.금)

은혜바라기 2022. 4. 22. 08:34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어제 묵상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제를 비판하는 너는 과연 누구냐?’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예수님)과 분리된 너는 과연 누구냐?’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비판'은 그 본질이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핵심은 바로 '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어제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정답’이 나오게 됩니다. 재미있겠죠?

 13절이 조금 뜬금없죠? 그러나 13절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단 한 구절로 규정한 부분입니다. 이 구절을 천천히 읽어 보세요. 이것이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이 어떠한 시각으로 보시고 있는지를 매우 잘 나타낸 구절입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라는 말은 현재와 미래(죽은 이후의 삶을 포함)를 이야기하는 말입니다. ‘어떤 도시’는 영문 성경으로 보면 ‘이 도시나 저 도시’로 되어 있습니다. 즉, ‘오늘이나 내일이나’는 ‘인생의 모든 시간’을 말하고 ‘이 도시나 저 도시’는 ‘인생의 모든 공간’을 말합니다. 즉, 이 세상에 창조된 ‘모든 시간과 공간’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의 모든 인류의 시간과 공간의 역사’를 뜻합니다. 

 ‘일 년’이라는 부분은 한 개인이 태어나서 죽는 시간을 상징합니다. 즉, 위에서 말한 부분이 천지창조의 인류 전체 역사를 말한다면 ‘일 년’은 한 개인의 일생을 뜻하죠. 그 뉘앙스는 바로 ‘짧다’라는 것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벌어지는 모든 것이 오직 ‘장사하여 이익을 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쌓는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쉽게 이해하도록 ‘돈(장사)’으로 설명을 하셨지만 돈 뿐 아니라 권력, 인기, 명예, 인격 등등 그 어떤 것이든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쌓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그런데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라고 하시죠. 성경에서 말하는 내일은 미래의 일 뿐 아니라 죽음 너머의 세상까지도 뜻합니다. 이렇게 죽음 너머의 세상을 묵상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 짧은 인생(1년)의 생명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80년 인생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로 보고 계시는 것이죠. 

 하나님은 왜 우주를 크게 만드셨을까요? 우리가 천체 망원경으로 우주를 보면 수 많은 은하가 한 개의 별 무리처럼 매우 많이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의 태양계도 그 수 많은 은하계 중 한 개일 뿐이죠. 그런 은하계는 수 천 만개의 별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죠. 그런데 우주에는 그런 큰 은하계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죠. 이렇게 따지고 보면, 지구는 그냥 ‘먼지’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런 지구에 점 처럼 존재하는 ‘나’는 먼지 조차도 안되는 ‘nothing(아무것도 아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주를 크게 만드신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알아 차리도록 그 정도의 과학기술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조차도, 우주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이 있나 없나를 찾아 우주로 떠나는 존재죠. )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한 시각을 가져야 할까요? 그것을 15절에서 말씀하여 주십니다. 한국 성경은 이 15절의 번역이 너무 이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 성경에는 이 15절이 인간의 잘못된 핑계인것 처럼 나왔지만 영어 성경으로 15절의 앞부분을 해석하면 ‘대신에 너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Instead, you ought to say) ’입니다.

 

 이 15절은 11절의 댓구로써 사용되진 구절입니다. 함께 풀어보면 '너희가 형제를 판단하여 율법의 재판장이 되는 대신에, 주님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라고 말해야 한다.'의 뜻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형제를 비판하게 되면, 즉 ‘나는 너와 다르다.’고 판단하여 ‘너는 틀리고 나는 옳다.’라고 주장하여 '분리'의 위치에 서게 되면 그것은 16절에 ‘허탄한 자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하시죠. ‘악’의 개념을 인본주의적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악’이라는 정의 조차 ‘하나님과의 분리’를 뜻합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매우 중요한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답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이 선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분리된 모든 것은 '악'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의 눈을 뜨게 되면 이 두 녹색 문장의 차이가 분명하게 보이죠. 제가 왜 자꾸 이렇게 선과 악의 개념을 꼬집고 있을까요? 이 개념이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 4장을 끝마칠 수가 없습니다. 그럼 4장 마지막 절을 보죠. 

 4장의 마지막 결론인 17절을 공동번역으로 보죠. ‘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입니다. 촛점을 잘 마추셔야 합니다. ‘악’이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선’이란 바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 복음에 촛점을 마추지 못하면 이 구절도 결국 '불우이웃돕기하는 착한 사람이 되자'로 해석이 되고 말죠. 더 끔직한 것은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렇게 알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 교회가 이런식의 말씀 해석의 극점까지 올라왔던 시기가 바로 '바리새인의 교회'의 시대였죠. 왜 예수님이 이 당시 그 시점에 오셨는지 아시겠죠? )

 

 선한 일을 하는 것이란 결국 하나님과 하나됨을 뜻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말씀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형제와 하나가 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즉, 복음을 알게 되는 것과 복음을 읽는 것,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죠. 

 

 그런데 17절 하반절은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이 죄입니다.'로 끝을 맺죠. 이것도 매우 중요한 핵심입니다. 즉, 인간은 선을 알면서도 실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그래서 17절은 오직 ‘선’을 행하시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 뿐이라는 결론도 들어 있는 구절입니다. 오직 그 분만이 하나님과 일체이시며 완벽한 순종을 하셨죠. 그리고 죄인(형제)과 한 몸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죠. 그리고 오직 말씀의 본질을 다 이루셔서 말씀 그 자체가 되신 분이시죠. 그래서 ‘선’은 오직 예수님만을 가리키는 수식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정체성을 풀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복음이라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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