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간음한 여인’은 바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옛 자아가 되어버린, 즉 세상의 인본주의에 묶여 버린 모든 인간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낱말이 ‘세상과 벗된 것’이라는 말씀이 나온 것이죠.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감정이 바로 ‘질투’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 가장 큰 낙심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마음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죠. 심지어 성경은 ‘나는 질투의 하나님이다.’라고 표현도 되어 있죠.
인간은 선악과 이후 부터 줄 곧 신본주의에서 벗어나서 인본주의와 간음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듣게 표현한 것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 됨'이라는 표현입니다. 성경은 사실 계속 이것을 고발하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질투에 대한 말씀을 5절에서도 이어가시죠. ‘하나님께서 성령이 시기(질투)하기 까지 우리를 사모(사랑)한다’고 하시죠. 이 말씀을 보면 이 세상이 어떤 이유로 창조 되었고 나는 어떤 이유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천지창조의 진짜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기 위해서이며 이것을 알아가는 시간이 바로 인생입니다. 이 인생 속에서 복음(하나님의 사랑)이 눈에 보이는 자들이 생겨나는데 이 자들이 바로 예수님의 신부들입니다. 교회죠.
6절을 보면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주신다고 하시죠. 그래서 우리는 겸손과 교만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겸손은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자들이 바로 겸손한 자가 됩니다. ( 내가 겸손하지 못하고 오직 예수님만이 겸손하는 것을 알게 된 자들이 겸손한 자가 되는 역설의 진리 속에 들어간다는 것이죠. )
이와는 반대로 ‘교만’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필요 없다.’입니다. 다른 말로는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다.’입니다. 교회에서 ‘저 사람 참 겸손하다’라고 할 때 쓰는 겸손은 그냥 ‘처세술’일 뿐입니다. 겸손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성품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겸손한 척 하는 처세술로 인기를 끌고 인간관계를 잘 이어가는 것을 추구하는 방향성은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교만과 겸손은 사람들 중에 나눌 수 있는 성품이 아니라 예수님과 인간을 나누는 본질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 최선이죠.
그래서 선택된 자들은 ‘저 사람은 자신이 겸손하지 못한 자라고 정확히 알고 있구나~~ 저 사람은 오직 예수님만이 겸손한 분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구나~~ 그래서 저런 교만한 자도 예수님 덕분에 겸손하다고 하나님께 여김받을 수 있겠구나~~‘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일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 ‘하나님께 복종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죠. 즉, 이렇게 하나님께 철저하게 복종하는 것이 바로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시죠. 이 마귀가 바로 ‘나의 옛 자아’입니다. 나의 옛 자아는 끊임없이 인본주의를 추구하는 간음한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귀를 대적하면 ‘너희를 피한다’고 나옵니다. 즉, 복음에 눈을 뜨고 그것을 묵상하는 동안에는 나의 옛 자아와 분리되어 생각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항상 묵상하셔야 합니다.
나의 옛 자아와 분리되어 생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신기하게도 세상 사람, 세상 종교에서도 희미하게 인식을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불교의 '해탈'이죠. 그들은 그것을 '면벽' 같은 노력을 통해 습득하고자 하죠. 하지만 절대 불가능합니다. 인본주의와 분리되는 것, 나의 옛 자아와 분리되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만 소망하려면 반듯히 전제조건이 있죠. 바로 나의 무가치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곡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 애통하는 자의 삶을 살아야 그때서야 비로서 위로 받은 자가 된다는 산상수훈의 요결입니다. )
그리고 8절의 시작인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말씀도 7절의 ‘하나님께 복종하라’는 말씀과 같이 ‘겸손’ 즉, ‘하나님(예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늘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 후에 나온 8절 말씀의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왜 하셨는지 아시겠죠? 우리 속에 있는 나의 옛자아와 거듭난 자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자들에게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하시죠.
‘성결’이란 ‘정결’ 혹은 ‘청결’과 같은 말입니다. 청결은 뭘까요? 방금 만든 하얀 쌀밥이 더럽나요? 깨끗한가요? 깨끗하죠. 그런데 그 하얀 쌀밥을 화장실 바닥에 뿌려 보세요. 그러면 그 하얀 쌀밥은 깨끗한가요? 오히려 화장실 바닥이 더러운데 우리는 그 바닥에 뿌려진 하얀 쌀밥을 더럽하고 생각하며 그 쌀밥을 치우죠. 즉, 청결(성결, 정결)이란 바로 '있지 말아야 하는 곳에 있는 것’을 분리 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신부의 마음 안에 옛 자아의 마음을 분리 시키는 것을 청결(정결)이라고 하고 이것을 조금 더 영적인 표현으로 ‘성결’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8절 마지막 ‘성결하게 하라’는 구절 직전에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청결,정결)’는 말이 전제되어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조금 문맥이 이해가 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