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오늘 말씀이 무척 어렵습니다. 1절과 2절을 인본주의 종교관으로 해석을 시작하면 2절 마지막의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라는 말과 전혀 연결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 천천히 인간의 상식과 논리만으로 다시 1, 2절을 읽어 보세요. 문맥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은 선택받은 자들이 이 땅을 살아갈 때 자신의 옛자아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에 대한 것입니다. 즉, 서신서의 주제죠. 서신서는 매우 어려운 책입니다.
‘너희 중에’라는 부분이 바로 ‘거듭난 나와 옛 자아’를 뜻합니다. 특히 거듭난 나는 예수님과 한 몸이기 때문에 더 확대 시켜서 말하면 ‘예수님과 거듭난 나와 옛 자아’가 함께 한 몸에서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상태로 이 땅에서 살게 되면 항상 싸움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싸우는 정욕’으로 부터 난다고 하시죠. 이 ‘싸우는 정욕’의 정체가 바로 ‘나의 옛 자아’입니다.
‘욕심, 살인, 시기’를 부려도 원하는 것을 능히 취하지 못하여 다투고 싸운다고 하죠. 이렇게 다투고 싸운다는 것은 바로 옛자아와 거듭난 자아간의 충돌을 의미합니다. 즉,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나의 옛 자아가 나의 거듭난 자아에게 시기를 부려 결국 늘 살인(박해.미움)한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실체화 되어 실현된 것이 바로 모든 인간 대 예수님의 장면입니다. 욕심 많은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께 시기를 부려 그 분을 십자가에게 살해하였죠. 즉, 인간과 예수님이 살인(분리)으로 결말이 나는 장면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근본적으로 풀어 보죠.
우리의 옛 자아가 탄생한 처음으로 돌아가 보죠. 선악과를 먹기 직전 인간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게 되죠. 이 때 부터 인간은 늘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는 죄에 빠져 살게 됩니다. 기준이 하나님으로 부터 인간의 기준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죠. 인간 스스로 천국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 ‘행복(천국)’이라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 스스로 그 천국(행복)을 만들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선물도 주신 것이고 ‘고난(엉겅퀴)’이라는 선물도 주신 것이죠. 그러나 참 천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잠깐의 행복’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죽음 너머의 천국까지 노력을 통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죠. 이 세상에서 ‘의’를 쌓으면 행복(천국)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다면 ‘해 봐라’ 하시면서 ‘율법’을 주셨죠. 하나님은 인간이 이 율법을 통해 ‘난 할 수 없구나~~’의 결론에 도달하기를 원하셨죠. 그런데 인간은 그 율법의 기준까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정도의 기준으로 바꾸면서 지켜내는 ‘바리새인’이 되어 버렸죠.
그래서 결국 인간은 스스로 깨달아 하나님의 긍휼 안으로 다시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래서 '나'대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나’ 대신 오셔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다 이루시고 ‘나’의 모든 죄 값을 다 치루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나)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긍휼을 찾지 않고 스스로의 기준과 노력으로 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을 찾지 않는 인간의 상태를 2절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라는 말입니다. 즉,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천국)을 얻으려 하기 때문에 절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절대 천국(행복)을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의 실체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현대 교회에서는 이 구절을 '거봐~~ 기도 열심히 해야 한다니까~~~(열심히 구해야 한다니까~~~)' 정도로 가르치고 받아들이죠.)
또한 이렇게 스스로 행복(천국)을 얻으려는 옛 자아의 모습이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즉, 옛 자아가 구하는 모든 천국(행복)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대부분이 이 3절을 우리가 교회에 가서 '로또에 당첨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같이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루어주시기 않는다'라는 뜻으로만 알고 있죠. 물론 이것도 맞는 답이기 하지만 이 3절은 좀 더 넓은 뜻을 가지고 있죠. 즉, 인간의 모든 노력은 전부 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노력하는 것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아닌데~~ 난 가족을 위해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희생적인 남편이자 아빠인 가장인데~~'라고 할 수 있지만 늘 말씀드렸듯이 이 때의 가족은 '확장된 나'입니다. 즉, '확장된 나'의 행복(정욕)을 위해 노력(구하는)하는 것이죠. 이것은 나라와 국가 더 넓게는 인류 전체에도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바로 '인본주의'라고 하죠. 결국 하나님 기준인 '신본주의'의 반대개념인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은 오직 '행복(정욕)'만 구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면 못 알아듣기 때문에 이것을 인간 한 명이 그 자신의 정욕을 구하는 장면으로 축소시켜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에 눈을 뜬 자들은 이 구절의 본질을 알아듣게 되죠. 그러나 유기된 자들은 다시 이 구절을 '불교식 정의'로 해석을 하게 됩니다. 즉, '무소유를 실천하라~~' '나 보다 남을 위해 살아라~~'의 촛점이 되죠.
복음에 눈을 뜨지 못하고 말씀을 한 문장 한 문장 제 글을 보고 이해하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늘 말씀드렸듯이 복음은 맹인에게 '빨간 장미'를 얼마나 휼륭하게 설명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잘 이해하는 똑똑한 사람인가? 의 방향성이 아닙니다. 복음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이게 바로 그 동안 내가 모순되게 여겼던 그 말씀, 그 세상이구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자세한 예로 설명드리면,
눈을 못 뜬 맹인이 ' 만져보니 아픈데 이게 빨간 장미의 가시구나~~ 만져보니 축축한 이 부분이 꽃잎 부분이구나~~ 설명을 듣고 보니 아래와 위쪽은 다르구나~~'의 방향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맹인의 눈을 조금씩 뜨게 하여 빨간 장미를 조금씩이라도 정확하게 눈을 뜨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줄기가 이렇게 생겼네~~ 아~~~ 잎이 이렇게 생겼네~~ 아~~ 흙이라는 것에 이렇게 묻혀있구나~~ 아~~ 이렇게 꽃잎은 빨갛구나~~~' 의 방향으로 인생의 순간 순간을 진행시키는 것입니다. 꽃 잎이 빨간색이라는 설명을 듣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꽃잎이 빨간색이라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죠. 이것을 본질적인 면으로 설명드리면, 성경에 쓰여진 예수님을 더 잘 알아가게 되고,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발가락이라도 조금씩 그냥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오셔서 이 복음을 알려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영적으로 예수님을 보게 하시죠. 그래도 헤깔리시지요? 너무 중요한 부분이므로 한개 더 예를 들어 보죠.
어릴때 보물찾기를 해 보셨죠? 10명의 아이를 두고 선생님이 보물 찾기 하는 방법과 힌트를 매우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고 해 보죠. 이때 9명의 어린이들은 그 '힌트'를 남들 보다 더 잘 듣고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 보다 더 보물을 잘 찾으려고 모든 신경을 귀에 집중하는 노력을 하죠. 근데 유독 한 아이만 듣지않고 싱글벙글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아이는 보물을 숨긴 선생님의 친 아들이었고 이미 이 선생인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미 보물이 숨겨진 곳을 알려주셨죠. 이 에피소드가 바로 마태복음에 나오는 '밭에 숨겨진 보화'의 에피소드 이야기와 같은 방향성입니다. 이 보물찾기의 예에서 말씀드린 복음의 본질을 예수님도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설명하신 것이죠.
더 노력하여 성경을 많이 읽고, 이 묵상을 더 열심히 보고 듣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짜 복음을 눈으로 보기를 원하는 끊임없는 '거룩한 고민'과 '차원이 다른 소망'을 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참 기도라고 합니다. 이것도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죠. 개들도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먹는다는 에피소드를 기억하죠? 복음에 대한 소망은 이정도로 간절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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