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완료)

약5:15-16(22.05.02.월)

은혜바라기 2022. 5. 2. 08:31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믿음의 기도’는 우리가 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십자가에서의 기도를 말합니다. 이것이 본질이자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후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상태, 즉 병든 상태를 우리에게 계속 속삭여 주면서 복음을 재 조명하시고 우리 대신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을 ‘믿음의 기도’라고 할 수 있죠.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에게는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은 오직 예수님만 가지고 있는 고유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는 것이죠.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믿음없음’을 알게 된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해하기 쉽게 ‘믿음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죠. 즉, 믿음의 그림자를 보고 믿음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묵상을 쫓아 오세요. 

 그래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다’라는 말은 바로 ‘성령의 속삭임과 간구가 인본주의 누룩에 감염된 예수님의 신부를 구원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후에 나온 말씀이 바로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입니다. 

 이것을 ‘내가 믿음이라는 감정에 집중해서 병든 자를 위해 도고, 중보 기도하면 주께서 그를 일으키고 죄를 범한 자도 다 사하여 준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오버해서 말하면 '나는 그 정도로 능력자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렇게 글로 적어 놓고 읽어 보니 정말 모순되고 어이없죠? 그런데 우리는 다 이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기도를 많이 하고 자칭 치유의 은사를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자기 능력 자랑'이 그 안에 숨어 있죠. 

 오늘 말씀에서 나온 ‘병’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감기, 암’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16절에서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하죠. ‘죄 고백과 병 낫기’를 서로 붙여 놓았습니다. 이것은 ‘난 어제 껌을 훔쳤어 그것을 고백할게. 그러니 내 감기를 낫게 해줘’입니다. 이렇게 풀어 놓으니 또 모순되고 어이없죠?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이 다 이런 식입니다. ‘맹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병은 바로 인본주의 누룩에 전염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죄’란 예수님과 분리된 것을 뜻합니다. 즉, 복음을 알게 된 자가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의 옛 자아의 속삭임에 넘어가서 다시 인본주의에 묶이면 그 때 예수님과 분리되는 죄에 빠진 것이 되고 이 상태가 인본주의 누룩에 전염된 상태이므로 ‘병’에 걸인 것으로 표현된 것이죠. 그래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서로 기도하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이 말씀도 결국 ‘ 김집사와 박집사가 새벽예배에 나와서 서로 기도하자’라고 풀어버리죠. 그래서 바로 나온 말씀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큰다’고 붙여 있는 것입니다. 즉, 방금의 인본주의 논리로 연결하면 ‘김집사와 박집사가 새벽예배에 나와서 서로 기도해라. 김집사는 의인이므로 역사하는 힘이 크다.’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 또 모순되고 어이없죠? ‘맹인’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롬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래서 오늘의 말씀을 정리해 보면, ‘인본주의의 누룩에 전염되어 예수님을 보지 않고 있는 자여~~ 그것을 성령께서 너로 하여금 다시 알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오직 의로운 분이신 예수님이 너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란다.’입니다. 우리의 기도 때문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열심'이 어느 순간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래! 그러면 앞으로 기도라는 행위는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로 받으시는 것도 매 일반입니다. 이런 자들도 결국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되는 (무)행위'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 숫자 철학을 보면, 0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하는 숫자인데 그 0을 숫자로 인식하여 1보다는 적은 숫자로 인식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결국 말씀은 오직 선택된 자들만 구분하여 볼 수 있는 메카니즘에 들어 있죠. 제가 최선을 다 해서 복음을 설명 드린다고 해도 사실 복음의 100분의 1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하면서 묵상을 하셔야 합니다. 즉, 이 묵상을 논리적으로 이해를 한다고 해도 복음에 눈을 뜨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한 에피소드가 예수님의 마지막 대인 사역인 십자가의 오른편 강도 이야기죠. 그는 단 몇 마디, 그 중 '천국에 가시면 나를 기억하소서'의 단 한 문장으로 '오직 천국은 예수님의 기억(선택)에 달려 있다'라는 복음의 핵심을 알게 된 자죠. 그래서 유일하게 천국행을 직접적으로 지목 받은 자가 되었죠. 주님께서 왜 마지막 대인 사역에 이 에피소드를 골라서 실행하셨고 왜 굳이 이 자를 지목하여 '천국행'을 허락하신 장면을 보여 주셨는지를 곰곰히 묵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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